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원구일영

앙부일구

얼마 전 문화재청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미국 경매에서 구입 환수한 특별한 과학유물 1점을 공개했다.
낙찰가는 6만 8,000달러 정도로 알려졌다.

뭣하는 물건인고?

‘원구일영’(지름 11.2센티미터, 전체높이 23.8센티미터)은 지구본 모양(원구·圓球)의 형태로 두 개의 반구가 맞물려 각종 장치를 조정하면서, 어느 지역에서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제작된 ‘휴대용 해시계’이다. 필자는 ‘원구일영’ 보도를 접하고 그 ‘휴대용 해시계’의 정확한 작동원리와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연구자들의 도움말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구일영’의 공은 아래 위의 두 반구(半球)로 나뉘어져 있다. 위쪽 반구는 고정되어 있고, 아래쪽 반구는 좌우로 돌릴 수 있도록 해놓았다. 위쪽 반구에는 시간을 표시한 12시진(2시간 단위) 글자와 시각을 나타나는 세로선 96각(하루 1,440분을 15분 단위로 나눔)이 그려져 있다. 또 시간 표시 아래에는 둥근 구멍을 뚫어놓았다. ‘시간을 알려주는 창문’이라는 뜻에서 ‘시보창’이라 한다.
어떻게 시각을 측정할까. 휴대용이고 해시계이니만큼 이 시계를 처음 세팅할 때는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시계에 달린 ‘추를 매단 줄(다림줄·이 시계에서는 흔적만 남아있음)’로 수평을 확인한 뒤, 별도의 휴대용 나침반으로 해시계를 북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런 뒤에는 해시계에 달려있는 위도 조절 장치로 현재 있는 곳의 위도를 맞춘다.
그 후에는 좌우 회전이 가능한 아래쪽 반구를 돌려 태양 쪽으로 맞춘다. 아래쪽 반구에는 태양이 비춰서 그림자를 낼 수 있는 영침(影針·일종의 시계침)이 설치되어 있다. 그 영침에 비친 태양의 그림자가 홈(길게 난 구멍) 속에 쏙 들어가 보이지 않게 맞추면 측정 준비는 끝이다. 그런 뒤 영침을 위로 올리면 영침이 가리키는 위쪽 반구에 표시된 12지 시간표시가 시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밑에 뚫린 구멍(시보창) 속에서 역시 12시진이 새겨진 시각표시(시패·時牌)가 ‘까꿍’하고 나타난다.
위의 시진(12지)은 시간을, 밑의 구멍 속 시진은 시각을 나타낸다. 세종 시대에 발명한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국보)와 자명종인 혼천시계(국보)에도 시보창이 뚫려 있다. 시보창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위쪽 원구에 표시된 12지 시간표시가 12지 중 9개뿐인 게 흥미롭다. 왜냐. 해시계라 굳이 해(·21~23시), 자(·23~01시), 축(·01~03시) 등 해가 뜨지 않은 밤 시간을 표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보는 휴대용 해시계

이 휴대용 해시계에 담겨진 갖가지 의미가 조명됐다. 우선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또 앙부일구보다 진전된 해시계라는 점도 부각되었다. 즉 앙부일구는 하늘을 향한 솥단지 형태(반구·半球)의 시계로 태양의 그림자를 비춰 시계를 확인하는 영침(影針)이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오로지 한 지역에서만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
반면 이번에 구입 환수한 ‘원구일영’은 두 개의 반구가 맞물려 각종 장치를 조정하면서, 어느 지역에서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해외여행 중이라도 해당 지역의 위도를 조절하는 장치를 사용하면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
심지어 어느 지역에서든 회전축을 지구 자전축과 일치하도록 맞추면 남반구 여행 중에도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받침대 표면에 ‘항해하는 선박’을 표현하고 있다. 선박용 해시계로 제작된 것이 아닐까 짐작되기도 한다. 그래서 19세기말 과학기술의 발전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 원구일영과 앙부일구의 차이점

- 원구일영 태양 빛에 따라 밑의 원구를 좌우로 돌리고, 영침에 맞춰 세계 어느 곳에서든 측정이 가능

- 앙부일구 영침고정이 고정되어 한 곳에서만 시간 측정이 가능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시계를 제작한 고종 경호원?

제작자와 제작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글자와 낙관(도장)이 새겨져 있는 것도 이 유물의 장점이다. 즉 ‘대조선 개국 499년 경인년 7월 상순에 새로 제작하였다(大朝鮮開國四百九十九年庚寅七月上澣新製)’는 명문과 함께, ‘상직현 인(尙稷鉉印)’이 새겨져 있다. 1890년(고종 27년) 7월 상직현(생몰년 미상)이라는 인물이 제작(혹은 제작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직현’은 누구일까.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따르면 상직현은 고종의 호위와 궁궐 및 도성의 방어를 담당한 총어영 별장과 별군직 등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원이었던 것이다.
상직현은 수신사로 일본에 간 경험이 있고(1880년), 그의 아들 상운도 청나라에 영선사로 파견된 이력이 있다. 상운은 조선에 전화기를 처음으로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다. 과학기술과 해외문물에 관심을 갖고 있던 가문이었을 것 같다.

원구일영이냐 일영원구냐

필자가 연구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유물의 이름을 ‘일영원구(日影圓球)’가 아니라 ‘원구일영’으로 고쳐 부른 이유가 있다.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보자. ‘가마솥(부·) 모양으로 하늘을 바라보는(앙·) 해시계(일구·日晷)’라는 뜻이다. 또 ‘일성정시의’(낮에는 해시계, 밤에는 별시계)에서 해시계 기능만 분리한 ‘소일영(小日影)’ 역시 ‘작은 해시계’라 했다. 명칭을 정할 때는 이렇게 형태를 먼저 앞세우고, 뒤에 기능을 붙이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이번에 구입 환수한 ‘휴대용 해시계’의 명칭도 ‘일영원구’가 아니라 ‘원구일영(공모양의 해시계)’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왜 이런 오류가 일어났을까. 해시계의 꼭대기 부분에 ‘원’, ‘구’, ‘일’, ‘영’ 4자가 둥글게 새겨져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원구일영’, ‘일영원구’ 등으로 읽을 수 있다. 아마 유물을 맨 처음 보았을 때 ‘일영원구’로 잘못 읽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원구일영’을 소개한 보도자료에서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었다. ‘영침이 고정되어 한 지역에서만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해시계(앙부일구)와 달리 일영원구는 (중략) 어느 지역에서나 시간을 측정할 수 있어 (중략) 당시 과학기술의 발전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라는 평가 부분이다.
원구일영의 구조(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한성판윤을 지낸 강건(1843~1909)이 1871년 제작한 ‘휴대용 앙부일구’(보물)(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휴대용은 맞지만 대중용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구입 환수된 ‘원구일영’은 당대 최첨단 시계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서양에서는 가슴에 품고 다니는 회중시계가 그 무렵(1890년)이면 이미 전 세계로 확산됐다. 19세기 초가 되면 손목시계까지 등장한다. 조선은 어땠을까.
한성판윤을 지낸 강건(1843~1909)이 1871년(고종 8년)이 만든 제작했다는 ‘휴대용 앙부일구’(보물)가 눈에 띈다. 조선의 해시계 중 가장 작고(세로 5.6센티미터×가로 3.4센티미터×높이 2센티미터) 정밀하며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럼 이번에 구입 환수한 ‘원구일영’이 회중·손목시계까지 대중화한 당대 서양과 비교할 수 있을까. 또 강건이 1871년 제작한 휴대용 앙부일구에 견줘 디자인이나 실용성 면에서 앞선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원구일영’은 휴대용은 맞지만 대중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선 별도의 나침반으로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줘야 한다. 측정하는 곳의 위도(서울은 북위 37.3도) 역시 사람이 일일이 맞춰야 한다. 이 ‘원구일영’은 어느 정도 천문지식에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가치면에서 앙부일구보다 뛰어날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원구일영’이 ‘앙부일구’보다 앞선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원구일영’이 ‘앙부일구’의 가치를 따라갈 수는 없다. ‘앙부일구’가 어떤 해시계인가. 세종이 농사를 짓고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시간과 절기를 스스로 알고 대비할 수 있도록 개발한 시계다. 그 앙부일구를 혜정교(광화문 우체국 인근)와 종묘 앞 등 대로변에 설치했다.
그뿐인가.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해 시간 표시를 한자로 쓰지 않고 삼척동자도 알 수 있도록 12지신 동물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러니 한 관리가 개인적으로 제작한 ‘원구일영’과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깃든 ‘앙부일구’를 감히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원구일영’의 가치 또한 낮춰 볼 이유는 없다. 원구형, 즉 공 모양이라는 아주 독특한 해시계라는 점과 시각을 표기할 때 전통의 앙부일구와 혼천시계의 전통을 따랐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상직현이라는 인물이 본인 혹은 상씨 가문 만을 위한 ‘한정판 해시계’를 제작(혹은 주문제작)한 것 같다. 결국 ‘원구일영’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휴대용 해시계라는 ‘아주 특별한’ 가치를 자랑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