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과학읽기

과학으로 본

충무공 이순신의 승리

조선 수군의 왜군 압승 비결 ‘거북선’
한국 소나무로 일본 삼나무 부쉈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사오니 죽기를 각오하고 나가 싸운다면 능히 적을 이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조정래 작가 위인전 ‘이순신’ p.153
영화 <명량> 포스터(출처: CJ엔터테인먼트)

진도 앞바다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의 말이다. 조선의 장군으로서 나라를 지키려는 책임감과 애국심이 강하게 드러난다.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은 ‘위대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을 수밖에 없는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한산도 대첩과 명량해전,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그가 왜군과 매번 겨룰 때마다 대파할 수 있었던 승리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김한민 감독은 명량(2014년)과 한산(2022년) 그리고 2023년 개봉 예정인 노량까지 3편의 영화 시리즈물을 통해 조선의 운명이 걸린 이순신 장군의 해전 활약상을 부활시켰다. 김 감독은 각 영화에서 이순신 장군의 세 가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용맹한 장수 용장(宂將), 지혜로운 장수 지장(智將) 그리고 현명한 장수 현장(賢將). 영화 ‘명량’에서의 이순신은 용장이었고, ‘한산’에서의 이순신은 지장이었다. 그리고 대미를 장식할 ‘노량’에서의 이순신은 현장으로 묘사될 예정이다.
영화 <한산 : 용의출현> 포스터(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

시기상으로는 한산이 가장 먼저 치러진 해전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3개월 후 7월 8일, 진주대첩‧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한산도 대첩이 터졌다.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단 15일 만에 왜군에게 한양을 뺏긴 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수세에 몰린 이순신 장군은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한 상황에서 학익진 전술을 펼치고 거북선을 돌격시켜 왜군에게 함포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 수군은 47척의 배가 침몰됐고, 12척을 빼앗긴 채 물러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 6년째,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이 일어났다. 12척의 조선 수군을 이끌고 330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이었다. 명량해전은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포기시키고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싸움이 벌어졌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종결됐고, 이순신 장군도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전쟁마다 왜군을 크게 무찌른 역사를 통찰하면서 많은 전문가들은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과 정신력 등 여러 승리 비결을 내세운다. 그런 가운데 과학기술인들 역시 과학적 측면에서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왜군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다양한 합리적 답을 내놓는다.

조선 수군과 왜군의 배, 무엇이 다른가?
소나무 vs 삼나무

조선의 ‘판옥선’과 일본의 ‘아타케부네’ 둘 중 과연 누가 셀까? 조선 수군의 승리는 선박의 재료와 구조에서 승패가 갈렸다는 분석이 많다. 조선 수군은 고려 말부터 개발해 사용했던 판옥선(板屋船)을, 일본 수군은 아타케부네(안택선, 安宅船)와 세키부네(관선, 關船)를 주로 전투에 배치했다.
판옥선과 거북선은 장수와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로 제작됐다. 소나무는 ‘소나무 아래에서 태어나 소나무와 더불어 살다 소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래 자란다. 평균 수명이 약 500년에서 600년이나 된다. 소나무는 조선시대 당시 상황에서도 구하기 힘든 목재였고, 목재를 물에 띄워 이송해 말리고 배로 제작하기까지 수년이 걸리기도 했다.
거북선과 판옥선은 소나무를 짜 맞춘 구조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와 나무 서로의 구조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나무사이 틈이 있어도 물에 잠긴 나무가 팽창하면서 더욱 결합이 단단해지게 된다. 강하게 서로 맞물리는 구조다. 또한 배 자체가 무겁고 튼튼했다.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속도는 느리지만 선회가 빠른 특징을 가졌다.
반면 일본의 배는 삼나무로 제작됐다. 삼나무는 소나무에 비해 빨리 자라고 가볍다. 아타케부네는 삼나무에 철못을 박아 만든 구조다. 철못은 바다에서 빨리 녹이 슨다. 실제 왜군의 배는 수명이 그리 길지 않았다. 전국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전쟁을 대비해 빨리 배를 만들어 병력을 수송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왜군과 조선의 배는 사용 목적이 달랐다.
바닥이 뾰족한 일본의 배는 첨저선으로 앞으로 빨리 갈 수 있지만, 방향을 선회하려면 길게 돌아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왜군은 포를 쏘는 전투방식보다 갈고리를 던져 상대 배에 올라타 싸움을 하는 백병전 전략을 선호했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백병전에 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육상에서는 백병전으로 조선군을 거의 궤멸시켰지만, 해상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가설이긴 하지만 거북선에 덮인 철판 때문에 왜군이 올라타지 못하게 함으로써 백병전 자체를 막는 효과가 있었다.

대포 발사! 정확성 수준 달랐다

조선의 판옥선과 일본의 아타케부네는 대포의 배치 방식도 큰 차이가 났다. 조선 수군은 바닥에 포를 놓고 쐈지만, 왜군은 대포를 보에 메달아 발사했다. 정확성에서 결정적 차이가 났을 것이다.
왜군의 선박은 삼나무에 못으로 만든 구조이다 보니, 대포를 쏘면 심한 반동으로 바닥이 망가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포를 기둥 보에 메달아 사용했다. 파도로 흔들리는 배에서 대포 조준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전투를 펼쳐야 했다. 그네를 타는 대포로 적진을 공격하는 꼴이었기에 정확도가 그만큼 떨어졌다. 반면 판옥선의 대포는 반 고정형이었다. 노를 젓는 공간 위에 대포를 배치해 적을 보고 정확히 조준해 발사할 수 있었다.
현재 거제대교 위치에서 일어났던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유인해 넓은 수역으로 끌어들여 학인진을 펼치고, 적군을 감싸 도망가듯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선회해 옆 부분의 선측 대포로 집중 공격하는 해전이었다. 학익진 전술은 매 전투에서 효과적이었고, 육지에서 주로 사용해 온 방식이었다. 왜군 역시 학익진 전술을 이미 육지에서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해상에서 펼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전술을 가볍게 봤다는 기록도 있다.

한산도 대첩 승리 주역 ‘거북선’
베일에 쌓인 그 모양과 구조는?

영화 ‘한산’에서는 왜군이 심히 두려워하는 존재로, 위엄이 넘치는 거북선(귀선, 龜船)의 등장이 압권이다.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조선 수군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의 구조를 개량해 덮개를 씌운 배이다. 아직까지 실제 거북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북선의 모양과 구조에 대해 3~5개 분파가 나뉘어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가장 논란의 중심이 되는 이슈는 거북선이 2층 구조인가 3층 구조인가이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판옥선을 빗대어 봤을 때 거북선은 3층 구조였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만약 2층 구조라 가정하면 대포를 쏘는 공간과 노를 젓는 공간이 중첩된다. 장정 2~3명이 전력을 다해 노를 저어야 하는 좁은 공간에서 대포도 쏴야 하는 조건을 일부러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난중일기에는 노를 젓다가 각혈하고 죽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해상에서 노를 저어 이동하는 일은 고된 일이었다. 판옥선의 3층 구조처럼 대포와 노를 젓는 공간이 분리됐을 가능성이 높다.
거북선의 용머리 용두에 대한 설도 다양하다. 대포를 쏘기도 하고, 유황연기를 뿜었다는 등의 다양한 주장이 있다. 충파(충돌) 시 강력한 충격을 주기 위한 충각설과 단순히 위압용 상징이었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일각에서는 판옥선 구조와 연계했다면 실제 거북머리에서 대포를 발사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포문을 많이 설치해 공격을 용이하게 하도록 구조를 변경하고 용머리 형태의 충각 겸 포문을 달아 돌격전에 용이하게 설계됐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강력한 대포를 쏘아대는 한산 영화에서의 거북선 용두는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장면이라는 해석이 많다.
실체가 없어 베일에 쌓여있는 거북선을 두고 여러 설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鐵甲戰船)으로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주력함이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