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가을 본색

 
시골 작은 마을의 한 초등학교 교실. 선생님이 몇 안 되는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손에 크레파스가 들려 있고, 책상 위에 도화지가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미술 시간인 듯합니다.
“선생님, 오늘은 뭘 그려요?”
조금이라도 빨리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충분히 느껴질 만큼 아이들이 들뜨고 큰 목소리로 질문을 합니다.
“오늘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한 가지 색깔로 표현해 보기로 할까? ‘봄’ 하면 어떤 색이 떠올라? ‘여름’을 대표하는 색을 고르라면 어떤 색이 좋을까? ‘가을’과 ‘겨울’은?”
그동안 자주 그려봤던 사과나 꽃병, 나무와 나비 말고 계절을 색으로 표현하라니 아이들이 잠시 어리둥절해하자, 선생님이 다시 한번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색 가운데 아무거나 하나 정해서 그리면 돼. 생각이 잘 안 나면 ‘빨, 주, 노, 초, 파, 남, 보’에서 하나 골라봐!”
그제야 오늘 과제를 이해한 듯, 아이들은 신나게 각자 사계절을 나타내는 색을 칠하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 완성된 그림들은 칠판 위에 전시되었고, 교실은 잠시 멋진 갤러리로 변신합니다.
아이들의 그림 속에서 봄은 주로 분홍색, 혹은 초록색으로, 여름은 주로 빨간색이나 파란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가을은 노란색과 갈색으로, 겨울은 흰색이거나 회색, 심지어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는지 빨간색으로 그린 아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그림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그림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을을 일곱 빛깔 무지개로 그린 그림이었죠. 선생님은 가을을 무지개로 그린 아이의 생각이 궁금해 질문을 합니다.
“혜숙아, 가을을 왜 무지개로 그렸어?”
혜숙이는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열심히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가을은 색깔이 너무 많아요. 빨강, 노랑, 알록달록, 갈대 색깔, 파란 하늘 색깔…. 그래서 갑자기 무지개가 생각나서 그렇게 그렸죠.”
혜숙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아이들은 덩달아 뭔가 대단한걸 발견한 것처럼 신나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럼 가을은 오늘부터 무지개색?”
  “그래, 맞다, 맞다, 무지개색~!!!”
  “와!!! 가을 색이 제일 예쁜 걸?”
무지개는 여름만이 아니라,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혜숙이 덕분에 선생님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색으로 계절을 칠해보라고 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단순했는지 깨달았죠.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후, 잠시 교실 창문 너머로 선생님은 마을의 가을 풍경을 바라봤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풍경이 정겨웠습니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보았던 무지개 피는 언덕 위의 마을 풍경이 바로 코앞에 와 있는 듯 반갑고 또 반가웠습니다.
가을은 흔히 ‘사색의 계절’이라고들 합니다. 올해 가을 저는 뜬금없지만 ‘무지개’에 대해 사색해 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신화나 이야기 속에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로 묘사해 왔습니다. 무지개를 가교로 삼아 인간은 신과 끝없는 연결과 소통을 통해 성숙함에 이를 거라는 믿음이 무지개 안에 함축되어 있는 듯싶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다리의 색깔이 총천연색이었을까?”
다양한 색이 하나의 색으로 수렴되면 소통은 단절되는 것이고, 오히려 다양한 색이 서로 나란히 조화롭게 어울려야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저마다 다른 색들이 본연의 색을 잃지 않고도 평화롭게 한군데 어울려 있는 모습이 바로 성숙함의 상징이며, 그래서 모든 것이 무르익어 가는 계절 가을의 색은 ‘혜숙’이의 말대로 ‘무지개색’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연구소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와 있을 겁니다. 계절마다 아름답겠지만 ‘알록달록’의 절묘한 조화로움의 극치인 가을보다 빼어나긴 어려울 것입니다. 타인들이 내 마음 같지 않다고, 내 생각과 너무 다르다고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형형색색의 그 다름을 통해 비로소 삶의 성숙함에 도달할 수 있는 다리 위에 서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