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閑山島月明夜上戍樓)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撫大刀深愁時)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何處一聲羌笛更添愁)’
최근 ‘이순신 장검’(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에 이순신 장군(1545~1598)의 ‘한산도가’가 대번에 떠오른다. ‘큰칼(大刀) 옆에 차고’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걱정하며 결전을 준비하던 장군의 얼굴이….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이순신 장검이 ‘한산도가’에 등장하는 그 칼일까.
‘이순신 장검’ 두 자루 모두 길이가 2m(196.8cm, 197.2cm)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칼이다. 무게는 각각 4.32kg 과 4.20kg에 달한다. 칼날에는 이순신 장군이 손수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三尺誓天山河動色)’(장검 1),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一揮掃蕩血染山河)’(장검 2)는 시구다. 1795년(정조 19) 왕명에 따라 발간된 <충무공 전서>에 실려있는 내용 그대로다.
또 칼자루 속 슴베에는 ‘갑오년(1595년) 4월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茂生作)’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두 사람이 장검 두 자루를 이순신 장군에게 바친 이유가 눈물겹다. 태씨 문중의 구전에 따르면 왜구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두 사람은 10년간 도검 제작술을 배운 뒤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왜군의 길잡이가 되어 귀국했다. 그러나 이순신 군대에게 붙잡혀 반역자 죄목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두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장군은 “그럼 대신 칼을 만들어 보라.”고 명했다. 두 사람은 10년간 배운 모든 기량을 다해 장검 두 자루를 만들어 바쳤다. 이번에 국보가 된 ‘이순신 장검’이다.
이순신 장검은 왜색인가
그럼 이 장검 두 자루는 왜 지금까지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을까. 일본도의 양식을 따랐다는 구설수 때문이었다. 그랬다. 이순신 장검이 일본칼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은 분명하다. 우선 슴베와 칼자루를 결합하여 못을 끼워 고정하기 위해 뚫은 구멍(목정혈·目釘穴), 칼자루 가죽끈을 엑스(X)자로 교차매기한 방식, 피를 흘려보내려고 판 일본식 피홈(혈조·血漕) 등이 그렇다. 또 칼끝과 칼몸이 이어지는 부분에 급격하게 두께 변화를 준 요코테(橫-よこて)의 완연한 흔적도 일본풍이다.
그러나 일본풍의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칼자루 표면에 붙인 금속판, 표면에 은실을 박아 장식한 전통 문양 등이 조선풍이다. 칼날에 새긴 글씨와 물결 무늬, 칼집 장식과 가죽끈, 그리고 칼집 상단의 테두리 및 하단의 마개 장식 역시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이순신 장검은 조선칼의 주된 요소에 일부 일본풍을 결합한 칼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 속에서도 태귀련, 이무생 두장인은 10년간 배운 일본도의 장점을 살려 조선 전통의 제철 및 공예기술을 마음껏 발휘함으로써 한층 업그레이드된 장검을 제작한 것이다.
의병장들은 왜 일본도를 썼을까
그래도 그렇지 다른 분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칼에 왜색이 가미되어 있다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무기도 형편없었다. 칼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선 개국 후 2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 게다가 조선의 주력병기는 궁시(활)와 화포였고, 칼은 보조 병기였다. 반면 일본은 150여 년의 전국시대(15세기 중반~16세기 말)를 거쳤다. 그 와중에 근접전에서 필요한 칼과 창의 제작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런 상황에서 왜군이 쳐들어와 길고 날카로운 칼을 휘둘러 대니 어떻게 됐겠는가.
선택은 세 가지였다. 노획한 일본도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일본도의 칼날만 빼내서 익숙한 조선검의 외장과 결합해서 쓰거나, 아니면 일본도의 칼날 등을 차용해서 새로운 칼(일본+조선식 칼)을 제작하는 방법을 썼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장군의 ‘장검(보물)’을 보자. 일본도의 칼날과 외장을 그대로 사용했다. 일본 칼집 특유의 고즈카(小柄·칼집 바깥 쪽에 끼는 작은 칼) 꽂이 부분만 나무로 덧대어 막고 조선제 장식을 바꿔 달았다. 권응수(權應銖, 1546~1608), 정기룡(鄭起龍, 1562~1622),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이광악(李光岳, 1557~1608) 장군의 칼도 비슷하다
이순신 장검은 실전용인가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과연 이 장검을 직접 차고 전투에 임했을까.
‘한산도가’에도 ‘큰칼(大刀) 옆에 차고…’라는 구절이 있지 않은가. 천하의 이순신 장군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불가능에 가깝다. 2m 앞에 있는 5kg 가까운 무게의 한쪽 끝 부분을 잡는다고 생각해 보라. 잡는 지점에 따라 실제로 느끼는 체감 무게가 2~3배 증가한다. 더구나 힘을 실어 휘두를 때는 순간적으로 칼끝에 실리는 무게가 수십 kg 이상이 될 것이다. 사람이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칼이 사람을 휘두르는 격이 된다. 무엇보다 이순신 장검 두 자루에는 실전에 사용한 격검흔(칼날끼리 부딪쳐 이가 어긋난 흔적)과 칼날 뒤틀림 현상도 보이지 않는다.
이순신 쌍룡검의 출현
그럼 이순신 장군이 찼다는 ‘큰칼’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단서가 있다. 일제가 설립한 조선고서간행회가 발간한 <조선미술대관(1910년)>에 이순신 장군이 차고 다녔다는 칼 사진이 나온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장검은 아니다. 그 ‘쌍룡검’의 사진과 함께 설명이 붙어있다. 소장처는 궁내부박물관(1908년 설립·이왕가 박물관)이라 했다. 설명문은 “…이 칼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패용했던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칼등에 새겨진 시를 소개했다. ‘쌍룡검을 주조해서 얻으니(鑄得雙龍劒)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千秋氣尙雄).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盟山誓海意) 충성스런 의분은 고금에 같다(忠憤古今同).’
이 시구가 주목을 끌었다. 순조 연간(1800~1834)에 훈련도 감을 역임한 박종경(朴宗慶, 1765~1817)의 문집(<돈암집> ‘원융검기’)에도 똑같은 시와 함께 ‘이순신 쌍룡검’이 등장한다.
“1811년(순조 11) 어느 날 병조판서 심상규(沈象奎, 1766~1838)가 찾아와 ‘이충무공이 차고 다닌 검’이라면서…나(박종경)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박종경은 그러면서 “칼등에 ‘쌍룡검을 주조해서 얻으니(鑄得雙龍劒)…’하는 시구가 있다”고 소개한다. 박종경은 그렇게 얻은 쌍룡검 한자루를 걸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인이 찾아와 ‘똑같은 검을 찾았다.’고 전했다.
“제가 충남 아산에서 온 사람한테서 샀는데, 장군이 아끼는 검과 어찌 그리 꼭 같단 말입니까.”
박종경도 “과연 벽에 걸어놓은 검을 비교해 보니 쌍둥이처럼 같았다.”고 표현했다.
감쪽같이 사라진 쌍룡검은 어디?
그렇다면 박종경의 <돈암집> ‘원융검기’와 <조선미술대관>이 소개한 쌍룡검이 같은 유물이라는 뜻인가.
무엇보다 이순신 장군이 차고 있던 쌍룡검이 정말로 존재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안타깝다. 그 쌍룡검은 지금 행방이 묘연하다. 1910년 <조선미술대관>이라는 책에 등장하고, 창경궁에 설립된 궁내부박물관(이왕가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조선미술대관>의 사진에 등장하는 두 칼이 박종경의 ‘원융검기’에서 “어쩌면 그렇게 똑같냐.”고 감탄했던 쌍둥이칼과 다른 칼이라는 견해가 등장했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미술대관>에 등장하는 두 자루의 칼을 한번 자세히 보라. 칼등 명문 20자만 같을 뿐 하나하나 뜯어놓고 보면 모든 부위에서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칼날의 ‘휨 정도(곡률)’를 보라. 우선 하단 칼을 기준으로 상단 칼이 43도 정도 뒤로 누워(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렇게 누운 윗칼을 바로 올렸다고 치고 계산하면 윗칼은 아래칼보다 70%(1대 1.71) 이상 더 ‘휨의 정도(곡률)’가 크다. 이 정도의 휨 차이라면 두 칼은 전혀 다른 칼이라 할 수 있다. 박종경의 ‘원융검기’와 <조선미술대관>에 등장하는 쌍룡검은 서로 같은 칼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각각 두 자루의 칼이 이순신 장군의 것이 맞니, 아니니 하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다.
‘이순신 장검’의 국보 승격을 계기로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장군의 칼을 한번 뒤져봄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