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과학읽기

디스토피아가 되어 버린

<콘크리트 유토피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월리엄 골딩(William Golding, 1911~1993)의 대표작, 소설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1954)은 재난을 당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섬뜩하게 묘사했다. 전쟁을 피해 가던 소년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신뢰와 우정으로 잘 견디어 구조되는 이야기면 좋겠지만 현실은 약육강식의 광기와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성의 상실이었다.
2023년 8월 개봉된 재난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할리우드 대작인 <오펜하이머>와 함께 맞붙었지만, 무난히 흥행에 성공했다.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등 인기배우를 캐스팅하고 재난영화이면서 코믹한 요소를 적절히 섞어 묵직한 주제를 잘 그려냈다. 김숭늉 웹툰 <유쾌한 왕따> 2부에서 모티브를 가져왔고 제목과 도입부는 박해천의 건축 에세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따왔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

10월의 어느 날 서울에 엄청난 지진이 발생한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지진에 서울의 모든 건물은 완전히 무너지고 오직 아파트 한 채만이 남았다. 이렇게 남은 황궁아파트 103동 주민들은 재난이 몰고 올 여파에 공포에 질리면서 살아남기 위해 외부자들로부터 자기 집인 아파트를 지키고자 한다. 우연히 대표가 된 김영탁(이병헌 분)은 점점 역할에 매몰되어 가고 주민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광기 속으로 매몰되게 된다. 이 영화에는 크게 모든 파국의 원인인 지진과 아파트와 폐허로 상징되는 콘크리트가 물질적인 소재로 등장한다.

모든 것이 파괴되는 지진

영화에서 서울은 엄청난 지진으로 온 도시가 폐허가 된다. 영화에서는 지진의 규모(M, magnitude), 진도(Intensity), 진앙, 피해 범위 등 지진의 정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2달 이상의 기간 동안 아무런 구조의 손길도 오지 않고 각자 도생의 상황이 계속된다.
지진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말하는 규모가 절대적인 크기라면, 진도는 관측자가 있는 곳에서 느끼는 지진의 상대적인 크기이다. 진원의 깊이, 지반의 지질구조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진앙에서 멀수록 감소하게 된다. 일반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도다. 기상청의 진도 기준에 따르면 진도 12의 지진이 와야 영화처럼 거의 모든 구조물이 파괴되고, 다리와 철도가 심각하게 훼손된다.
판의 경계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나라의 경우, 지진의 안전지대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지진이 발생하기는 어려운 지질환경이다. 특히 서울은 중생대 쥐라기의 화강암 암반과 선캄브리아기 편마암이 지반을 이루고 있는 상당히 안정된 지역이다. 영화적인 설정이지만 거의 초자연적인 설정으로 보면 된다.
우리나라는 지진의 빈도가 비교적 약했고 건물의 지진 대비는 한국전쟁 이후 급한 주거확보가 먼저여서 등한시됐으나 1978년 홍성지진(M5.0), 속리산지진(M5.2)을 계기로 내진설계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1988년 건축법이 개정되면서 일부 규모의 건축물에 대해 내진설계가 의무화되었는데, 현재는 2층 이상 연면적 500㎡ 이상, 높이 13m 이상의 건물에 내진설계가 의무화되어 있다.
하지만 내진설계를 적용하려면 많은 건축비가 들고 설계의 목적이 건축물의 보호가 아닌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 완전한 붕괴를 막는 것이기 때문에 황궁아파트같이 홀로만 남게 되는 경우는 매우 비현실적이다. 강력한 내진설계가 되어있는 원자력발전소의 경우라면 가능할 상황이다.

오래된 첨단 기술, 콘크리트

폐허의 회색 톤은 콘크리트인데 사실 영화에서는 아파트와 동일어로 사용되는 듯하다. 즉, 아파트 유토피아가 정확한 제목이다. 오늘날 전체 국민의 52.4% 이상이 사는 대중적인 주거시설인 아파트는 1937년 지어진 서울 충정아파트가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콘크리트가 현대 건축물을 이루는 주요 재료라서 현대적인 재료로 오해할 수 있지만, 콘크리트는 그 유래가 오래되어 그리스 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석회질 암석인 백악과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조개껍데기를 구워 석회를 얻었고 여기에 산토리니섬의 화산암을 섞어 고강도 내수성 시멘트(hydraulic cement)를 고안했다. 로마인들은 베스비우스 산과 로마 근처에서 포촐라나(pozzolana)라고 부르는 화산재를 발견하여 이를 시멘트와 섞어 콘크리트를 개발, 사용했다.
대표적인 콘크리트 유적으로는 기원후 115년에서 125년 사이에 세운 로마의 판테온(Phanteon, 만신전)을 들 수 있다. 돔 내부의 지름이 43m로 지붕은 완벽한 반구형을 이루고 있고 천장을 이루는 5,000t의 콘크리트를 6m의 원통형 벽체가 지탱하고 있다. 천장에는 화산암인 부석을 넣어 전체 무게를 줄였다. 그 밖에도 세고비아 수도교, 알칸타라교 등이 남아 있다.

콘크리트의 미래

30년도 안 된 아파트가 안전 등급을 충족하지 못하고 헐리고 있다. 로마 시대의 건축물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아직 우리는 정확한 콘크리트의 사용법을 모르는 것이다. 콘크리트의 단점은 잡아당기는 힘에 대한 강도(인장강도)가 낮아 균열이 발생하기 쉬워서 갑자기 부서져 버리는 취성파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로마인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콘크리트를 압력을 받는 건물에만 사용하였다.
1865년 파리의 정원사였던 조셉 모니에(Joseph Monier)가 잘 깨지는 점토 화분 대신 강철 프레임을 넣은 콘크리트로 화분을 만들어봤다. 우연히도 강철은 콘크리트와 팽창계수가 거의 같았고 형성된 시멘트의 칼슘실리케이트는 강철에도 잘 붙었다. 이로써 인장강도를 높일 방법이 개발된 것이다.
이후 여러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가 추가되고 있다. 일례로 콘크리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균열이 발생하고 수분이 침투하여 풍화작용이 심해진다. 결국 건축물의 강도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염기성 환경에서 발견되는 파스테우리(B. pasteurii)라는 박테리아는 방해석을 분비한다. 따라서 콘크리트에 이 박테리아와 먹이가 되는 전분을 넣어 두면 콘크리트에 들어온 물과 접촉하면 대사활동을 통해 방해석을 분비하여 균열을 메우는 자기 치료 콘크리트를 만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섬유보강 콘크리트, 자기 청소 콘크리트 등 다양한 기능성 콘크리트가 개발되고 있다.
영화에서 아파트의 소유는 계층을 나누고 집단을 만들었다. 내가 살려면 남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각자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 나라면 어떤 입장에 섰을까? 다 알지만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 하는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여운이 남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