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김치 속에서 찾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

월동용 김치를 한자로 ‘동저(冬菹)’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를 김장이라고 부를까?
조선시대 요리법을 기록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보배를 감춘다는 뜻의 ‘진장(珍藏)’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여기서 진장이 김장으로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치를 보배로 표현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과거 어려운 시절, 채소가 나지 않는 추운 겨울에 김치는 오래 보관하며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서민들에게 김치는 주요한 영양 공급처였으니 보배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

김장 김치는 겨우내 먹어야 하는 만큼 양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이웃들이 서로 돌아가며 ‘김장 품앗이’를 했다. 품앗이란, 말 그대로 힘든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며 품을 지고 갚는 일이다. 먼저 김치를 담근 집에서 사용하고 남은 소금물을 다른 집에서 돌려가며 사용하기도 했다. 이웃끼리 노동의 수고로움과 정다움이 오갔다. 그 틈 사이로 서로의 김장 비법까지 은밀히 공유했다. 우리 집 김치 맛에 옆집 김치 맛 비법이 더해지면서 매년 김치 맛은 더욱 깊고 다채로워졌다. 어느 겨울에는 옆집 김치 맛이 났다가, 다음 겨울에는 아랫집 김치 맛이 나기도 했다. 지금처럼 마트에서 판매하는 획일적인 김치 맛에 익숙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이다.

김장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돼지고기 수육에 막 담근 김치를 싸서 먹는 운치가 있었다. 장시간 노동을 함께 견디며 무사히 김장을 마친 기념으로 작은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품삯 대신에 김치를 받아 갔다. 비록 온몸은 뻐근하지만, 한 손에는 김치를 다른 한 손에는 이웃의 정까지 두둑이 챙겨갈 수 있었다.

김장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행위를 뛰어넘는다. 과거에 어려운 시기를 나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인 만큼, 우리는 이 빨갛고 매운 것을 담그며 마음속에 풍요로움을 담았다. 또한 여러 손으로 함께 담근 김치를 겨울 내내 맛보며 화합과 결속력을 다졌다. 한국인만이 누릴 수 있는 따듯한 문화다. 2013년 유네스코가 김장을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짧은 역사 속, 김치의 급격한 발전

지금 우리가 즐겨 먹는 빨간 배추김치는 생각보다 그 역사가 짧다. 통배추가 전국에 보급된 것은 20세기 초부터이니 약 100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 김치의 주재료는 무였다. 또한 고추가 들어오기 전에는 소금에 절인 백김치 종류뿐이었다. 이를 보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는 우리 김치가 생각보다 단시간 내에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농경 생활을 했던 선조들의 식생활과 관련이 깊다. 농경민족인 우리는 밥을 주식으로 하고 반찬을 부식으로 하던 식생활을 지켜왔다. 잘 사는 양반 계층은 육류를 포함해 다양한 반찬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형편이 좋지 않았던 백성들의 반찬은 대부분 무김치와 장아찌 정도였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고된 농사에 필요한 에너지를 대부분 밥 속의 탄수화물로 채웠다. 그런 만큼 한 끼 식사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밥을 먹곤 했다. 그 많은 밥을 넘기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 짭짤한 반찬이었을 것이다. 봄, 여름, 가을에는 산과 들에서 나는 다양한 채소로 반찬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채소가 나지 않는 겨울에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반찬이 필요했고, 여기서 김치가 탄생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춧가루와 젓갈 등의 재료가 추가되었고, 더욱 깊은 맛으로 발전해 왔다.

김치에서 찾는 법고창신(法古創新)

김치가 우수하다는 여러 근거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끊임 없이 진보해 온 김치의 역사’를 들고 싶다. 사실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먹는 요리는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다.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는 물론 서구에도 양배추절임 같은 음식은 흔하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음식은 대체로 절임 채소에 식초를 첨가한 단순한 형태를 가진다. 하지만 김치는 절임 채소에 다른 재료를 혼합하여 독자적인 요리로 발전했다. 무엇이든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힘든 법이다. 김치는 보편적인 채소요리에 선조들의 창의력을 더하고, 우리나라 각지의 자연환경에 맞게 변용하여 우리만의 전통음식으로 꽃피운 자랑스러운 문화다.

김치를 먹을 때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되새긴다. ‘법고창신’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고 늘 새로운 맛으로 발전해 온 김치만큼 법고창신의 정신을 잘 반영한 음식이 또 있을까.

김장철은 한 해의 마지막인 겨울이다. 일 년 동안 경험하고 쌓아온 것을 토대로 새롭게 다가올 한 해는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지 상상해 보기 충분하다. 김치의 역사가 말해주듯, 발전의 가능성은 절대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짧은 시간 동안 방대한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의 인생에서 새롭게 다가올 2024년에는 어떤 혁신을 일으킬지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