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나에게 주는 선물,

일상의 리추얼

초등학교 시절 내게 가장 큰 선물은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는 것이었다. 방학식, 개학식, 졸업식은 물론이고 생일에도 우리 가족은 중국집을 찾아 짜장면을 먹었다. 달콤 짭짜름한 맛에 언제 다 먹었는지 금세 그릇이 비면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면을 덜어주시곤 했다. 그러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이거 느끼해서 왜 먹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5인조 보컬그룹 지오디(god)가 ‘어머님께’라는 곡에서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고 노래했을 때, 난 알았다. 자식들 입에 조금이라도 더 넣어주시려고 애써 짜장면이 싫다고 하신 분이 우리 어머니만이 아니었다는 걸.
중학교 시절 내게 가장 큰 선물은 만화와 게임이었다. 그래서 방과 후 친구들과 오락실을 찾아가 함께 게임을 했고, 만화방에서 저녁이 될 때까지 만화책이며 무협지를 읽다가 집에 돌아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힘든 일도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왜 그렇게 힘들어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만화와 게임은 그렇게 힘들게 하루를 보낸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자 보상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잠을 줄여가며 대학입시 준비를 하면서도 나는 주말이면 영화관에 가곤 했다. 일주일에 딱 두 시간 정도 그렇게 영화 속으로 빠져들고 나면 수면부족 상태로 입시 준비를 하는 일주일을 버텨낼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 막막한 미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음악이었다. 최루탄이 자욱했던 1980년대 대학가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신촌 음악카페에서 비틀즈, 도어즈, 레드제플린을 즐겨 들었다. 사회에 나와서는 퇴근 후 선술집에서의 술 한 잔이 가장 큰 선물이었고, 결혼 후에는 아내와 함께 하는 저녁식사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큰 선물이었다. 아이들이 생기고는 가끔 가족여행을 선물로 줬고 그 중에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해외여행도 있었다.
물론 꽃다발, 시계, 반지, 옷, 가방 등등의 선물들도 무척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내게 진짜 선물은 ‘시간’이라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됐다. 물건은 시간이 흐르면 낡고 결국에는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때의 행복했던 시간을 담은 어떤 기억이나 추억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도 짜장면을 먹으러 가면 그래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고, 만화책을 볼 때면 가슴이 설렌다. 머리가 복잡한 날이면 도피하듯 영화관에 찾아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고, 음악을 듣거나 술을 한 잔 하거나 때때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면 그 때의 행복했던 시간들이 소환되고 재현된다.
너무 바쁜 일정에 쫓겨 시간을 낼 틈조차 없을 때도 나는 작은 것이나마 나만을 위한 선물을 챙긴다. 요즘 푹 빠져 있는 건 ‘골목길 걷기’다. 약속 시간 30분 전에 미리 그 동네에 가서 동네 골목길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게 그것이다. 그렇게 하면 동네의 활기도 느낄 수 있고, 사람의 온기 또한 느껴진다. 또 그 곳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시간 또한 각별하게 느껴진다. 그 동네가 가진 느낌이 여운처럼 만남 속에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것을 리추얼(ritual, 의식)이라 부른다. 일종의 ‘자기만의 의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자 마음이 괴로울 때 자신을 일으킬 수 있는 ‘작은 일상’이라고도 한다. 내가 아는 한 여행 기자는 가끔씩 시간을 내 혼자 산이나 바다로 떠나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신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생존의 시간’을 가끔씩 벗어나 자기만의 ‘존재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는 여행이 그 만의 리추얼인 셈이다. 또 내가 아는 한 저술가는 책 한 권을 다 쓰고 나면 마치 의식이라도 치르듯 최고급 와인 한 병과 시가를 즐긴다고 한다. 그 작은 사치의 시간이 그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상이자 선물이 되는 셈이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채송화(전미도)가 이익준(조정석)에게 “넌 요즘 널 위해 뭘 해주니?”하고 묻는 장면에서 나는 리추얼을 떠올렸다. 의사로서 낮이고 밤이고 필요하면 환자를 위해 달려가야 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싱글 대디로서 아이를 키우는 그에 대한 애정과 걱정이 가득한 채송화의 질문이다. 그런데 그 질문에 이익준은 의외의 답변을 한다. “이렇게 너랑 같이 밥 먹는 거? 너랑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거. 난 나한테 그 거 해줘” 그렇게 같이 보내는 시간 자체가 그에게는 리추얼이 되었던 것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닌 소소하고 소박한 일상의 리추얼이 얼마나 우리네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힘인가를 말해주는 드라마였다. 매일 같이 수많은 환자들을 대하고 때론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사력을 다하고, 때론 가슴 아픈 사망선고를 내려야 하기도 하는 일상의 연속이지만, 어쨌든 여기 등장하는 의사들은 함께 모여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광경으로 끝을 맺는다. 이들은 병원에서의 지위나 대단한 수술의 성취 같은 건 행복한 삶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대신 친구들과 모여 수다를 떨고, 함께 밥을 먹고 또 좋아하는 밴드 활동을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 말한다. 이 리추얼을 통해 이들은 다시 힘을 얻고 환자들을 향해 달려간다.
가끔은 나를 위한 사치를 부려도 좋을 것이다. 평소에는 살 수 없었고 또 할 수 없었던 거창한 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리추얼은 소중한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그 일상 속에 있지 않을까. 매일 함께 밥을 먹고, 맛있는 커피를 함께 마시고, 수다를 떨며 보내는 누군가와의 일상이 있어 우리는 슬기롭게 매일 매일의 힘겨움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