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든든한 옆집

 
납작납작한 빨간 지붕 담장 안에서 대추나무며 감나무 그리고 라일락과 목련이 서로 밀쳐가며 골목길을 기웃거리던 동네였다. 이런 동네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빨간 지붕 몇 채씩이 무너지더니 그곳에 6층짜리 빌라들이 들어섰다. 그 사이사이 묵은 집들이 옹이처럼 박혀 있다. 몇 년 전에는 우리 집과 노부부가 사는 옆집도 그랬었다.
봄철이면 부쩍 집을 팔라며 부동산 사람들이 대문 벨을 눌러댔다. 노부부의 집이 팔렸다고 했다. 그 뒤 본격적으로 우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팔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팔린 노부부 집이 일 년이 넘도록 빈 채로 폐가가 되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아이가 그 집을 샀고, 두 집을 헐어 우리도 빌라를 지었다. 그리고 아들네와 이웃이 되었다. 바로 옆집이다.
주위에서는 아들네와 옆집으로 사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닐 거라 했다. 남편도 우려했다. 하지만 나만 겪을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아들은 몰라도 며느리는 선뜻 내키지 않았을 터였다. 다만 서로 속내를 덮고 오순도순 지낼 수 있도록 애써볼 거라는 마음가짐이 며느리에게나 나에게 있지 싶었다. 사실 나는 염려보다는 설렘에 들떠 있었다. 아홉 살짜리 손자 태윤이 때문이었다.
맞벌이하는 딸아이가 아이를 낳자 사는 집을 세놓고, 제 아이를 나한테 맡길 심산에 우리 곁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도 유치원을 다닐 때도 나는 아이와 손잡고 정말 신나게 다녔다. 딸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다시 자기 집으로 이사했다. 나는 아이가 보고 싶으면 하교 시간에 맞추어 교문에서 기다렸다가 전처럼 손을 잡고 집에 데려다주곤 했다. 이제 태윤이 녀석과도 이처럼 손잡고 다닐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뛰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프리랜서로 재택근무를 하는 터라 굳이 내가 돌보지 않아도 되지만 가끔 부탁을 받는다. 그럴 때면 열 일 제치고 학교나 학원에 녀석을 데려다주거나 데리러 간다. 녀석도 나만큼이나 좋아한다.
이런 귀한 연이 된 옆집에 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짓은 하지 않기로 애초에 마음을 다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옆집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신경이 자꾸만 쓰였다. ‘외출하는 건가’ 아니면 ‘이제 들어오는 건가, 그러면 먼저 우리 집에 들러 인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하면서 내가 나에게 쏙닥대곤 했다. 마음 한편에 섭섭함이 방울방울 맺혔다. 하지만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풀 방구리에 생쥐 드나들 듯 우리 집에 드나드는 손주 녀석 하나면 되었다. 녀석 때문에 두 집 문은 늘 열려있다.
이렇게 마음을 비우니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섭섭함도 아침햇살에 이슬방울 스러지듯 그렇게 스러졌다. 그러던 어느 날, 깔깔거리며 이야기하는 나와 제 어미 사이로 태윤이가 끼어들면서 “꼭 친정엄마랑 딸 같네”라고 했다. 외가에 자주 드나드는 녀석의 눈에 우리 고부 사이가 모녀처럼 보였나 보다.
“어머니, 게장이 맛있더라고요” 시장에 다녀온 며느리가 식탁에 게장 한 접시를 놓고 간다. “갈치가 싱싱하고 살이 도톰하더라. 이건 너희 것이다”라며 나는 현관문을 반만 밀고 건네준다. 이렇게 옆집과 오가며 산지가 벌써 2년이 되었다.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선물’이라고 하던가. 나에게도 오늘이 선물이고, 그 선물은 바로 옆집이다. 새벽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와도 오늘 하루가 든든하고 미덥기 때문이다. 내일은 모를 일이다. 내일 옆집이 먼 곳으로 이사를 할지도, 더 넓고 좋은 집을 찾아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이 더 선물 같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나와는 다르게 남편은 내일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런 남편에게 나는 “태윤이가 중학교에 갈 때쯤이면, 넓은 집으로 이사 갈지도 몰라요” 하면서 가끔 예방주사 놓듯 그의 가슴을 찔러댄다.
우리 쓰레기봉투를 수거장에 갖다 놓겠다는 아들에게 고맙다고, 예의 바른 이웃 노인처럼 인사하는 남편의 속마음이 보여 안쓰럽기도 하다. 아들네를 그냥 옆집, 그냥 이웃으로 여기기에는 남편이나 나나 나이가 들었다는 게 현실이면 현실이라 하겠다.
그래도 오늘 확실한 선물, 든든한 옆집이 있어 그저 좋기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