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흙수저 신라 장군은

명품 황금보검을 차고 있었다

1973년 5월 경주 미추왕릉 지구(현 대릉원) 인근에서 도로공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옛 시청 앞에서 계림 사이의 구간이었다. 막 시멘트 배수관을 설치하려고 도로의 양쪽을 깊이 파내는 순간! 수십 기의 무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무덤밭이었다. 새롭게 확인된 무덤이 55기나 됐다. 이들 무덤에 ‘계림로 1~55호’라는 번호를 붙였다. 그 중 ‘14호’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봉분은 이미 깎여 있었고, 그 위에 민가가 있었지만 파보니 돌무더기가 보였다. 4~6세기 반짝 유행했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흔적이 분명했다. 무덤의 규모는 동서 3.5m, 남북 1.2m 정도의 소형에 속했다. 천마총·황남대총 같은 왕릉급 무덤은 아니었기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란히 누운 두 남성은 누구?

그러나 발굴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다. 크기 36cm에 불과한, 듣도 보도 못한 유물 1점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황금 보검’. 칼의 몸집은 대부분 부식됐다. 그러나 칼집과 손잡이가 화려한 황금이었다. 표면에 S자형·네모형·사다리꼴·나뭇잎·바람개비 등 윤곽을 만들고 그 속에 맑고 검붉은 석류석과 유리질을 녹여 넣어 장식했다. 장식의 중간과 외곽에는 금 알갱이를 붙여 놓아 화려함을 가미했다.

이같이 화려한 황금보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무덤 안에서 인골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치아와 가는 귀고리 한 쌍씩’ 나란히 놓여있었다. 시신 두 구가 나란히 묻혔다는 얘기다. 두 사람은 부부였을까. 신라 고고학의 관점에서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신라 고분의 경우 ‘가는 고리 귀고리(세환이식)’는 남성, ‘굵은 고리 귀고리(태환이식)’는 여성에게서 주로 보인다. 계림로 14호 묘의 두 주인공은 둘 다 ‘가는 고리 귀고리’를 차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는 남성 두 사람이 나란히 묻혔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보였다. 왼쪽 피장자의 허리쯤에는 황금보검과 허리띠가, 오른쪽 피장자의 허리쯤엔 큰 칼(대도)이 각각 놓여있었다. 두 피장자의 키는 150~160cm로 추정됐다. 치아를 분석해 보니 20~39살 사이의 건장한 성인이었다.

흙수저였던 두 사람

그두 사람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을까. 무덤 규모가 소규모(3.5m x 1.2m)였으므로 왕족은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피장자가 차고 있던 황금보검과 대도의 뒷면에 묻은 직물의 흔적을 분석해 보니 무늬가 있는 비단(紋綾)이었다. 게다가 무덤에는 비단벌레 날개를 장식한 최고급 화살통과 함께 각종 말갖춤새가 들어 있었다. 특히 용 문양을 한 안장이 눈에 띈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데, 임금이 하사한 물품은 아니었을까. 다만 두 사람의 신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오른쪽 피장자(대도)보다 황금보검을 지닌 왼쪽 피장자의 신분이 더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정리해 보자. 무덤이 소규모인 것으로 보아 피장자들은 ‘금수저’ 출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규모의 무덤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훗날 혁혁한 공훈을 세워 황금보검 같은 명품 칼을 하사받는 영예를 누렸을 것이다.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형제의 무덤이었을까. 혹은 전우였을까.

신라산(産)이 아닌 증거

그런데 아무리 봐도 수수께끼 같은 유물이 바로 황금보검이었다. 신라에서는 볼 수 없는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무덤의 주인공, 특히 황금보검을 차고 있는 이가 귀화한 서역인이 아니었을까 보는 견해도 있었다. 일리 있는 해석이다. 실제로 황금보검 외에도 유리 장식 등 서역과 관련된 유물들이 계림로 14호 묘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 즉 서역인이라고 할만한 증거가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추정은 가능하다. ‘황금보검≠신라산(産)’이라는 성분분석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황금보검의 금속 성분을 보면 구리의 비율이 3.0~3.3%에 달한다. 비슷한 시기 신라의 다른 무덤에 출토된 황금 제품의 구리 함량과 다르다. 즉 천마총·금관총·교동에서 출토한 금관과 수식, 관모, 관식 등 신라의 금제품 7점 중 6점의 구리 비율은 1% 미만이다.

반면 최근 보고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와 헝가리 출토 금제품의 구리 함량은 높다. 예컨대 영국 박물관이 소장한 2~7세기 크림반도 출토 금제품의 구리 함량은 1~5% 사이다. 이 가운데 황금보검과 비슷한 사례가 3건(구리 비율 3%) 있었다. 또 430년쯤 훈족 유적으로 추정되는 헝가리 나직수우스 출토 금제품(162점)의 상당수는 2.8~4.8%다. 계림로 14호 묘에서 출토된 황금보검의 제작지가 적어도 신라는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 황금보검과 매우 유사한 칼의 일부가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28년 옛 소련인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우연히 발견된 검의 파편이다. 실물은 아니지만 신장 위구르 자치구 쿠차 지역의 키질 석굴 벽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와 펜지켄트 벽화, 그리고 이란 사산조 페르시아의 은제 잔에서도 확인된다.

이 밖에도 키르기스스탄, 알타이, 투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석인상에서도 비슷한 검이 보인다. 이 중 계림로 황금보검과 거의 일치하는 것은 두 개 정도다. 보로보에의 출토품과 키질 69호 석굴 벽화 입구 천장에 묘사된 공양인 상의 허리춤에 달린 보검 그림이다. 황금보검의 출처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신장, 알타이, 투바 등 중앙아시아 지역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황금보검 = 해외명품

황금보검이 해외명품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사실 경주 고분 출토품 가운데는 외국산(産)이 더러 보인다. 예컨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제 감옥 팔찌 1점이 대표적이다. 이 팔찌는 단면이 판상을 띠고 표면에 터키석 등 보석을 ‘감장(嵌裝)’한 것이다. 감장은 금판 위에 청옥 등을 박은 알집을 또 다른 금판으로 만들어 붙여서 장식하는 기법이다. ‘알물림’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금속판을 덧대어 장식하는 기법은 흑해 연안 노보체르카스크 시의 호흐라치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이나 이란 등 서역의 팔찌에서 확인되는 기법이다. 따라서 이 팔찌 역시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밖에도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상감 유리옥과 로만 글라스(유리용기) 또한 서역산(産)일 가능성이 높다.

동로마제국에서 기원한 제작 기법

연구자들은 황금보검의 제작연대를 5세기 초로 추정한다. 그런데 그 시기 황금보검과 제작 기법이 비슷한 다양한 유물들이 유럽 전역에서 고르게 확인된다. 특히 흑해 부근에 집중돼 있다. 러시아 아나파 인근의 미카엘스프에르드 무덤에서 타원형 문양대와 누금 기법이 확인된다. 계림로 황금보검 태극 문양에서 보이는 세밀한 물결 무늬도 보인다. 이뿐이 아니라 흑해 인근 여러 곳에서 석류석과 유리를 넣은 유물들이 다수 확인된다. 특히 황금과 붉은색 석류석을 사용한 것은 동로마제국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 기법은 훈족의 발흥과 유럽 침략에 따른 민족 대이동 시대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즉 황금보검의 제작 기법은 동로마제국이나 또는 동로마제국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여러 이민족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치품, 해외명품으로 치장 경쟁한 신라인들

황금보검은 어떻게 이역만리 신라에까지 왔을까. 중국이나 고구려를 통한 수입이거나 혹은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한 소그드·박트리아·에프탈 상인들의 거래한 해외명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어떤 계층이 이 해외명품을 수입했을까.

앞서 밝혔지만 4~6세기 신라의 장례문화는 독특했다. 왕과 왕족들은 자신의 배타적인 지위를 과시하려고 무덤을 대형화하고 장례도 성대하게 치렀다. 현세의 삶이 내세까지 이어진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온몸과 무덤을 황금으로, 해외명품들로 치장했다. 대표적인 외래품은 계림로 황금보검을 비롯해 은제 타출문 그릇과 식리총 출토 신발, 감옥 팔찌, 그리고 25점의 유리그릇 등이다.

귀한 물건들이 많았던 만큼 그들은 도굴이 무서웠을 것이다. 나무곽을 만들어 시신을 안장하고 그 위에 엄청난 돌무더기를 쌓았다. 덕분에 1500년 후의 후손들은 그들이 남긴 찬란한 황금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지만…. 황금보검은 어떨까. 발굴이 끝난 지 43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해외명품 황금보검을 찬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그 옆에 칼을 찬 이는 또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