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53
원자력 e-뉴스레터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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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최근 독일-오스트리아 공동 연구 그룹에서 발표한 논문 한 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연구 내용은 일견 단순하다. 레이저를 방사성 동위원소인 토륨-229에 쪼여 원자핵의 상태를 변화시켰다고 한다. 독일의 유명한 과학 유튜버 사비네 호센펠더는 노벨상감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걸까?
보통 원자라고 하면 당구공 몇 개를 뭉친 듯한 원자핵의 주변을 탁구공 같은 전자가 빙빙 도는 모습으로 떠올린다. 이런 그림은 원자가 원자핵과 전자로 이뤄져 있는 것을 설명할 때 유용하지만, 실제 원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원자핵은 크기가 아주아주 작다. 전자가 돌아다니는 범위가 A4 용지 전체라고 해도 원자핵은 머리카락보다 가늘므로 매우 작은 점으로 용지에 찍어야 한다.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원이나 타원 궤도로 돌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 것도 사실과 다르다. 원자 크기의 작은 세계에서는 정해진 궤도란 의미 없는 개념이며, 전자는 원자핵 주위에 확률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자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 뿌연 구름 같은 전자 확률 분포가 종이를 가득 채우고, 원자핵은 아예 눈에 띄지도 않는 재미없는 그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원자핵에는 원자가 가진 질량과 에너지 대부분이 모여있다. 원자가 가진 잠재 능력을 제대로 이용하려면, 전자구름 속에 꼭꼭 숨어있는, 그것도 극도로 작은 크기의 원자핵에 어떻게든 접근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20세기 과학사의 커다란 발견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오토 한, 프리츠 스트라스만, 그리고 리제 마이트너는 중성자를 이용하면 우라늄 원자핵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모두가 아는 대로 이 발견은 원자폭탄 제조와 원자력 발전으로 이어졌고, 인류에게 어둠과 빛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원자핵에 다가가는 또 다른 방법은 커다란 가속기를 이용해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입자나 광자를 쏘아주는 것이다. 입자 물리학 연구를 위해 사용하는 거대한 가속기가 그런 예이다. 가속기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도 있다. 암 진단을 위해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을 하려면 가속기로 만든 약물을 사용해야 한다. 병원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는 가속기에서 산소-18 원자핵에 양성자를 쏴 불소-18 원자핵으로 바꿔주는 식이다.
원자핵을 직접 건드리지 않고도 전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어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산소-18은 자연에 존재하는 산소 중 불과 0.2%만 차지하는 동위원소이다. 99.8%인 산소-16보다 원자핵에 중성자가 두 개 더 들어 있을 뿐, 화학적으로는 이 둘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병원에서 쓰려면 어떻게든 산소-18의 비율을 높여야 한다. 두 동위원소의 전자 사이에는 극히 미세한 에너지 차이가 있는데, 정밀한 레이저를 쓰면 둘을 분리해 낼 수 있다.
그런데 서두에 언급한 독일-오스트리아 그룹의 성과는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다. 전자라면 몰라도 원자핵 자체는 광학 레이저가 가진 에너지로 직접 영향을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수십 년 전부터 토륨-229 원자핵만큼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예측했고, 다년간의 노력 끝에 원자핵을 들뜬 상태로 변화시키는 레이저 에너지를 찾아냈다. 이로써 인류는 원자핵을 직접 건드리는 방법을 하나 더 보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건 어디에 쓸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논의되는 것은 ‘원자핵 시계’이다. 현재는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해 원자시계를 사용한다. 실은 ‘1초’의 길이도 세슘 원자시계를 바탕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런데 원자시계는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기 쉬운 전자를 이용하므로, 대신 원자핵을 이용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원자시계의 발명이 노벨상으로 이어진 전례가 있으므로 노벨상 호들갑이 꼭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한편 방사성 동위원소, 레이저, 핵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한데 묶어, 수십 년에 걸쳐 기초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던 연구 환경에는 부러움을 넘어 경외감이 느껴진다.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 없다고 탄식만 하지 말고, 우리나라에서도 대학과 출연연구기관이 기초연구에 힘을 모을 방법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