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기후변화 등의 대변혁 요인들로 인한 대전환의 시대에 청정전기 수요의 증가
와 산업용 에너지의 청정화에 대응하는 노력이 당면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최근 발생된 호주-중국 무역전쟁과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필요성,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신냉전 시대의 도래에 따른 공급망 의존성과 에너지 자원의 무기화로 야기된 에너지 위기의 대응도 새로운 도전과제로 대두되었다. 대변혁의 요인들과 함께 공급망 회복력 강화의 필요성이 에너지 분야의 대전환을 촉진시키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 안보 및 기후변화 대응에 부합하는 에너지믹스는 환경 보존과 경제 성장이란 두 가지 시각에서 지속가능성이 평가되어야 하며, 에너지 주권의 확보는 자원 안보, 에너지 안보 관점을 넘어 경제안보와 국가안보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다음에서는 새 정부 국정과제 ‘과학적인 탄소중립 이행방안 마련 및 에너지안보 확립’에 부합하는 명제로서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믹스의 구성, 그리고 이를 위한 원자력의 역할 및 발전방향에 대해 과학기술 정책과 기술혁신의 관점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에너지 위기는 연료 확보의 불안정, 공급시설 가동률과 수요의 급작스런 변동에 따른 수요-공급의 불일치, 그리고 탄소중립 이행 과정에서 설정된 에너지믹스의 취약점 등 장단기적 요인들로 인해 예기치 않게 발생될 수 있다.
좁은 국토와 산악지형 등의 지형적 제약, 에너지 자원 빈국, 93% 수준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 에너지 다소비형 제조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무역국가, 지정학적 에너지 섬 등으로 평가되고 있는 우리의 에너지 현실을 고려하면 공급 다변화의 노력에 분명히 한계가 있다.
에너지 위기 대응 능력을 제고하면서 이산화탄소 감축 대응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술 혁신과 함께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요구됨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지난 해 국제사회에 약속한 ‘2030년 이산화탄소 배출 40% 감축’과 ‘2050년 탄소중립’ 목표는 매우 도전적이라는 평가이다. 신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유럽연합에 비해 두 배의 탄소감축 노력을 필요로 하고, 미국과 일본에 비해 짧은 기간 내에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경제포럼이 작년 4월 발표한 세계 에너지 전환지수 분석에서 지적한 낮은 안전성, 접근성과 환경지속성 등 우리의 열악한 에너지 환경을 고려하면 우리가 제시한 탄소중립 목표 달성 과정이 매우 험난할 것이나, 청정에너지 확보를 위한 기술혁신을 통해 목표의 실현성을 높여서 부담을 후대에 넘기지 않아야 한다.
기후변화 및 에너지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에너지믹스 정책은 과학적 사실 및 데이터에 근거하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지속가능성’ 요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청정성 요건에 충실한 기술 중립적(technology neutral) 관점에서 가장 효과적인 공급원을 선택해야 한다.
둘째는 공급 안정성 확보 요건으로서, 가용한 청정에너지 공급원의 규모 및 기술성숙도, 지정학적 리스크, 국제통상 및 국가안보 관점 등 자국의 제반 여건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어야 한다. 최근의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유럽연합이 신재생에너지 설정목표를 재설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셋째는 경제성 요건으로서, 자원 보유특성 등 국가별 여건의 차이, 소요 에너지원의 기술적 특성과 소요 투자규모 등을 고려한 종합적인 평가를 필요로 한다.
넷째는 수용성 요건으로서, 물리적, 환경적, 정서적 측면과 함께 소요 비용·기간 등의 다각적인 분석을 필요로 한다. 에너지 밀도 차이를 고려한 소요 부지면적, 전원 특성에 따른 송배전 계통의 추가 등은 수용성 및 경제성 측면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된다.
지속 성장이 전제가 되어야 하며 에너지 위기 저항성이 큰 탄소중립형 사회의 구현에 필요한 에너지믹스는 목표의 실현성 및 수단과 방법의 지속성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환경 보존과 경제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일본 및 다수의 유럽 국가들이 탄소중립에 필요한 저탄소 청정에너지로 신재생에너지와 함께 원자력을 선정하고, 원자력의 지속적 이용 및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국가 차원의 에너지전환 전략을 수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현성과 지속가능성을 갖춘 에너지믹스를 위해서는 신재생에너지-원자력에너지 공존형의 존이구동(尊異求同) 전략 선택이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서는 공급 효율과 경제성이 크게 향상된 신재생에너지 기술의 확보, 이의 이용 확대를 뒷받침해 주기 위한 안정적인 기저부하 역할로 기존 원자력에너지의 지속적 이용, 안전성과 공급 유연성이 향상된 선진 원자력 기술의 적극적인 활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경제성과 신뢰성을 갖춘 대용량 고효율의 에너지 저장기술, 탄소 포집·저장 기술, 미래 에너지 신기술 등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혁신 노력을 병행함으로써 에너지 자립도 개선 및 탄소 중립 실현의 부담이 미래세대에 과중하게 전가되는 상황을 피해야 할 것이다.
원자력 에너지는 1951년 미국 EBR-1 원자로의 운전 개시 이후 70년간 전력을 공급해 왔다.
지난 20여 년 동안 80% 이상의 평균 시설가동률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10~15%, 유럽의 25% 수준, 국내의 25~30%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왔다. 원자력 전기는 높은 공급 안정성과 경제성을 바탕으로 현재 32개 국가에서 기저부하 공급을 담당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지역에 공급되는 청정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는 이용률의 큰 편차로 인하여 과부족시 대응을 위해 대용량의 에너지 저장시설과 즉시성의 보조 공급원이 함께 준비되어야 한다. 신재생에너지 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우리 고유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면 신재생에너지 이용 계획은 간헐성·변동성의 대응책 마련과 함께 저장시설 및 보조공급원에 대한 막대한 소요 경비 및 시간 등을 고려하여 규모의 타당성, 실현가능성 및 효과성이 신중히 평가되어야 한다.
2021년 중반 영국, 덴마크, 스페인 등에서 바람이 잦아들자 급감한 풍력 발전량으로 야기된 지속적 전기부족 상황, 2021년 2월초 텍사스의 한파 및 2020년 8월말 캘리포니아의 열풍 등으로 인한 대규모 순환정전 사태 등은 모두 신재생에너지 의존 비중이 높은 전력시장에서 기후변화로 인해 초래된 전형적인 에너지 위기 사례이다. 최근 호주-중국 무역마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불안정한 에너지 공급 상황과 세계적 인플레이션 현상은 글로벌 규모의 에너지 위기를 다시 초래하고 있다.
대표적인 탈원전 국가인 독일의 경우 금년 말까지 가동 원전 3기를 마지막으로 폐쇄할 계획으로 있는데, 과도한 신재생에너지 의존에 따른 전력공급 불안정으로 인해 발생되는 여러 사례들을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국내 저품질 갈탄의 지속적 이용에 따른 탄소중립 조치의 역행,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도입 의존도 증가로 인한 에너지 안보의 심각한 취약성, 에너지 위기 대응을 위한 국가안보 측면의 불가피한 타협, 신재생에너지 공급의 계절별·주야간 큰 편차에 따른 주변국과의 송전 마찰 등은 우리들에게 매우 교훈적인 사례인 것이다.
원자력의 미래 . 다양성, 유연성 제고
원자력 에너지는 연료의 비용 및 공급안정성, 기술집약적 특성 등을 고려하여 ‘준 국산’ 에너지로 평가되며, 국내에서는 1978년 고리원전이 가동된 이래 30여년간 에너지 자립 및 공급안정성 확보에 큰 기여를 해 왔다. 최근의 분석에 따르면 국내 원자력 시설은 신재생에너지 대비 1/3 정도의 시설용량으로도 1.3배 정도의 전력을 공급함으로써, 신재생에너지의 생산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으며, 신재생에너지의 상업적 경쟁력 확보에 필요한 시간적 징검다리 역할도 제공해 오고 있다.
원자력 에너지는 현재 공급 안정성 및 경제성 측면에서 신재생에너지 보다 절대적 우위의 특성을 보이고 있으나, 인지적 측면의 안전성 및 친환경성 관점에서 일부의 우려가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다양한 과학적 분석에 따르면 원자력은 신재생에너지와 유사하거나 오히려 낮은 ‘전주기 환경영향’ 평가 결과를 보이고 있다. 원자력이 안전하고 친환경적 에너지원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꾸준히 전달하는 노력이 대중의 인식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점은 미국원자력학회와 한국원자력학회의 2021년 설문조사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원자력 에너지는 활용성 및 가동 유연성을 제고하여 매우 다양한 목적과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어서, 이를 위한 기술개발 노력이 최근 일부 선진국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기저부하를 담당해 온 가동 원전의 운전 유연성 향상, 전력생산 규모의 다양화를 통한 활용성 제고, 또는 신재생에너지 공급원-저장장치와 원자력의 결합을 통한 혼합형(hybrid) 공급시스템 구현 등을 통해 원자력의 이용을 극대화하는 기술개발 노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소형 원자로(SMR) 개발 동향(문주현 외, 『대통령을 위한 에너지정책 길라잡이』. 핵공감클라스(2021))
중소형 원자로가 노후 석탄 발전를 대체하여 전기를 생산하거나, 열에너지를 직접 공급하여 청정수소 생산, 해수 담수화, 또는 산업에너지 용도로 활용하거나, 또는 대형 선박용 동력을 제공하는 등의 다양한 형태로 원자력의 활용성을 제고할 수 있다.
또한 초소형 원자로를 이용하여 극지·오지, 우주기지 등에 전기 또는 열에너지를 공급하거나, 우주선의 동력 공급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개발되고 있다. 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열을 이용하여 천문관측·군사용 위성 또는 우주용 기기의 전력 공급원으로는 이미 활용되고 있다. 최근 성 공리에 발사된 누리호에도 한국원자력연구원이 개발한 원자력전지가 장착되어 에너지 공급 능력이 실증되고 있다.
원자력 에너지는 대용량의 고열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청정수소 생산 방법으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래의 수소경제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고효율 대용량의 청정수소 공급이 핵심이며, 이를 위해서는 친환경적 생산 및 경제적 운송이 관건이다. 대용량의 원자력 수소 생산기술로는 가동 중 원전의 열(~250℃)을 이용하거나 또는 수요처에 인접한 공급원으로 고온가스 원자로(750~900℃)를 이용하는 기술들이 일부 선진국을 중심으로 개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선진형 원자력 기술 개발을 통하여 안전성, 경제성, 유연성을 제고하고 폐기물 처리 부담을 완화하려는 노력과 함께, 전기·열·수소·동력 등 여러 형태의 에너지를 해양, 극지, 오지, 우주 등의 다양한 수요처에서 직접 생산, 공급하는 기술들이 활발히 개발되고 있다.
작년 초에 출범한 바이든 민주당 정부는 48년 만에 친원자력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이전의 트럼프 정부에 이어 원자력을 청정에너지로 규정하고, 여야의 초당적인 지원하에 원자력을 포함하는 탄소중립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에는 기존 원전의 지속적인 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부 지원의 긴밀한 민-관 협력체제 하에서 안전성과 친환경성이 향상된 선진 원자력 기술의 개발과 함께 이의 상용화 추진을 위한 실증 프로그램 및 인허가 실현성 증진 방안들이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 등은 2050년까지 지금보다 세배 정도의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고, 이를 위해 최근에 원자력의 이용 확대 전략으로 전환하였다. 유럽연합도 지속가능한 투자 기준인 녹색분류체계의 수립 과정에서 저탄소 에너지 공급원으로 원자력을 포함하는 결정을 최근 확정한 바 있다.
이들 선진국들이 에너지 위기 대응 및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에너지 안보 또는 국가안보 차원으로 대처하면서 에너지믹스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결정한 것은 우리의 국가 에너지 정책과 추진전략 수립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처럼 원자력은 저탄소 청정에너지로서 안정적 전력공급, 입증된 안전성, 기술집약성 등의 주요 특성을 바탕으로 에너지 위기 및 탄소배출 감축 대응을 위한 핵심 에너지원으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원자력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함께 정책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안전성 향상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통하여 기술적인 측면의 객관적 안전성(safety) 확보 넘어서 대중의 인지적 안심(relief)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가동 원전의 노후화(ageing)에 적극 대응하여 계속운전의 기술적 추진기반을 확보해야 한다.
둘째, 신재생에너지 대비의 우월한 경제성이 지속 확보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동 원전의 계속운전 활용 및 가동율 제고, 그리고 운전의 유연성 향상 또는 타 에너지원과의 결합 운전(hybrid system)을 통한 가동성, 경제성, 활용성 제고에 필요한 기술 개발과 법적·제도적 보완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강건한 공급망 유지 및 우수한 전문인력 확보와 함께 수출금융 지원 방안을 마련함으로써 경쟁국 대비 우월한 경제성을 갖춘 신규원전 공급 능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방안의 조속한 실현을 위한 법적·제도적 조치가 완비되고, 사용후핵연료의 효율적인 처리·재활용·처분 등에 필요한 선진 기술을 신속히 확보해야 한다.
넷째, 선진 원자력 과학기술들이 신속히 도입될 수 있도록 관련 인허가체계 및 안전기준을 적기에 마련하고, 전문가들에 의해 신규 기술 성능과 안전성이 신속히 평가될 수 있는 준비가 병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후변화 위기 및 에너지 위기에 대한 국가안보 차원의 전략적 대응에 필수적인 원자력 에너지의 활용성 제고와 원자력 과학기술의 진보를 위한 정책적 지원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
에너지 위기 상황 및 탄소중립 실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청정에너지 공급원의 안정적 확보가 가장 중요하고, 이를 위한 에너지믹스 정책은 에너지 수급의 기술적 대응 차원 뿐만 아니라 환경보호 및 에너지안보의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에너지 자립도 개선을 통한에너지 주권의 강화 노력도 미래를 위한 현 세대의 책임과 의무로 여겨야 할 것이다.
에너지믹스는 공급 안정성 확보를 위한 최적의 조합을 선택하되, 활용 자원의 한계성 및 에너지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성 등의 고유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공급망 재편 등의 새로운 국제통상 질서가 미칠 장기적인 영향을 고려하는 국가안보 차원의 전략적 선택이어야 한다. 원자력 에너지는 국내 에너지 수급 상황을 고려해 보면 궁극적으로 신재생에너지와 함께 청정에너지 공급원으로서 상호보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원자력 에너지의 안정적이고도 경제적인 공급을 위해 필요한 원자력 과학기술은 안전, 핵안보, 핵물질 비확산 등 세 가지 필수요소에 관한 국제적 합의 기준을 바탕으로 개발, 활용되어야하며, 관련 기술·제품의 수출을 위해서는 과학 기술적 측면 이외에 산업, 금융, 국제통상, 외교, 국제협약 등 다면적인 시각의 접근이 필요한 분야이다. 국가적 차원의 전략적인 접근과 통합적 시각의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원자력은 탄소중립과 에너지 주권의 실현을 위한 최고의 무기’라는 유럽연합 10개국 장관의 담화, 에너지믹스의 선택에 있어 ‘이념을 버리자’는 IAEA 사무총장과 ‘과학을 따르자’는 바이든 대통령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환경 보존과 경제성장 지속을 위한 원자력 이용의 불가피성을 재차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