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 지나는 바람에서 찬 기운이 느껴지고,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10월이 되면 전 세계인의 눈은 북유럽으로 쏠린다. 올해로 12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벨상 때문이다.
올해는 10월 3일 노벨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4일 물리학상, 5일 화학상, 6일 문학상, 7일 평화상, 10일 경제학상 수상자가 차례로 발표된다. 1,0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2억 9,250만원)의 상금, 금메달과 상장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석학’이라는 영예가 누구에게 돌아갈지 기대가 커지고 있다.(물론 이 글을 읽게 되는 순간에는 이미 수상자들의 면면이 밝혀진 상태이겠지만 말이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한 달 전부터는 ‘예비 노벨 과학상’이라는 별명이 붙은 각종 상들의 수상자가 발표된다. 이런 차원에서 지난 9월 15일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d of Science)는 제11회 황금거위상(Golden Goose Award) 수상자를 발표했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기초과학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도 당장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연구만 하는 기초과학에 정부가 투자를 해야 하냐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상원의원이었던 윌리엄 프록스마이어는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국민세금이 낭비된 것으로 보이는 과학연구를 골라 ‘황금양털상(Golden Fleece Award)’을 시상했다.
이에 하원의원인 짐 쿠퍼는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와 함께 기초과학 연구가 쓸모없고 황당해 보일 수 있지만 나중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취지에서 미국 정부 예산을 받아 연구한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를 골라 2012년부터 ‘황금거위상(Golden Goose Award)’을 시상하고 있다.
올해는 펨토초 레이저를 이용해 시력을 개선하는 ‘블레이드리스 라식’ 기술을 개발한 연구팀과 중저개발국에서 전염병을 진단하거나 가짜 약물을 식별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저렴한 종이 현미경을 만든 과학자들, 청자고둥이 갖고 있는 생체독에서 만성통증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진통제를 만든 연구자들이 황금거위상의 영광을 안았다.
미국 스탠포드대 생명공학과 마누 프라카쉬 교수와 짐 사이불스키 폴드스코프사 대표는 1달러 미만의 재료로 고배율의 종이 현미경을 만든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들이 만든 종이 현미경은 렌즈, 배터리, LED전구가 정렬된 형태로 연필 한 자루 정도의 무게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으며 밟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도 망가지지 않을 정도의 내구성을 자랑한다. 배율도 2,000배에 달해 기존 광학현미경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폴드스코프(Foldscope)로 이름 붙여진 이 종이 현미경은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 160개 이상 국가에 약 200만 개가 보급됐다. 특히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지역 저개발국가에서 수인성 전염병의 원인균도 현장에서 즉시 발견하고, 새로운 병원균을 발견하는데 활용돼 왔다.
또 최근에는 시력 개선을 위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시술인 라식 수술, 그중 메스를 사용하지 않고 레이저를 이용한 블레이드리스 라식 기술을 개발한 5명의 연구자들에게도 황금거위상이 돌아갔다. 수상자 중에는 펨토초 레이저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201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도나 스트릭랜드 영국 워털루대 교수와 제라드 모루 프랑스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수도 포함됐다. 이들의 연구 덕분에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부작용 없이 안전하게 시력을 개선할 수 있게 됐다고 미국과학진흥협회(AAAS)는 선정 이유를 밝혔다.
또 발도메로 마르케스 올리베라 미국 유타대 교수와 로데즈 크루즈 필리핀대 교수를 중심으로 한 4명의 과학자들은 필리핀 해안에 서식하는 독성 바다달팽이 중 하나인 청자고둥이 갖고 있는 코노톡신(Conotoxin)을 이용해 다양한 약물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코노톡신은 척추동물의 중추신경계와 근육신경계를 마비시키는 작용을 해 독사, 복어, 전갈이 갖고 있는 독보다 훨씬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노톡신에 노출되면 손 쓸 틈 없이 목숨을 잃게 된다. 이들의 연구 덕분에 코노톡신을 이용해 중독을 유발하는 마약성 약물과 달리 효과는 강력하고 안전한 진통제를 만들 수 있게 돼 만성통증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게 됐다. 미국과학진흥협회(AAAS)는 이들의 연구는 동물 신경계를 도식화해 뇌신경계 연구에도 도움을 줬다며 수상 이유를 밝혔다. 연구를 이끈 로데즈 크루즈 교수는 해양 생물학 분야의 석학으로 2009년 ‘제12회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회장이자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 발행인 수립 파릭 박사는 “황금거위상은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기초과학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는 인류의 호기심을 충족시킨다는 기본적 목적 이외에도 국가 안보와 경제를 강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노벨상 수상자 발표 2~3주 전에 열리는 ‘이그 노벨상’은 올해도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만드는 유머과학잡지 ‘애널스 오브 임프로버블 리서치’는 황금거위상 수상자가 발표된 같은 날 10개 부문에서 ‘제32회 이그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손잡이를 돌리는 효율적 방법을 연구한 일본 치바공대 연구팀에게 돌아간 공학상, 법률 문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분석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팀의 문학상이다.
일본 치바공대 연구팀은 손잡이의 크기가 작을수록 손잡이를 돌리기 쉽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팀은 2018~2020년 법원 문서 데이터베이스와 표준 영어 문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법률 문서가 어려운 것은 용어나 내용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법률 관련 전문가들이 오래된 단어를 쓰거나 수동태를 주로 사용하고, 문장을 길게 늘려 쓰는 등 글 쓰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