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글, 그림
김물길 화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길 위에서 마주한 수많은 경험을 통해 그 이상의 것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고 지금까지도 제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는
소중한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행을 시작한 지 6개월쯤이 되었을 때, 아프리카 나이로비에 도착했습니다.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으며 숙소를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겁먹은 여행자로 보였기에 나쁜 의도의 현지인들이 주변에서 위협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한 아줌마가 저의 팔을 탁 잡아끌면서 그 상황을 벗어나게 해줬습니다. 그분의 성함은 로즈메리. 마땅한 숙소를 찾지 못해 결국 아줌마 댁으로 가게 됐는데, 가보니 놀랍게도 허름한 판자촌이었습니다. 작은 방에 아이들만 다섯 명. 바퀴벌레도 많고 정말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곳에서 무려 4일을 머물렀습니다. 없는 살림에도 손님인 저를 대접하려는 로즈메리 아줌마의 마음 덕분에 어떤 비싼 숙소보다도 그곳이 편하고 좋았습니다. 그분을 보며 나누고 베푸는 마음은 가진 재산과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로즈메리 아줌마가 준 따스한 깨달음을 마음에 그대로 품고 바로 이동한 곳은 아프리카 동쪽에 커다란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였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도 휴양지로 손꼽히는 세인트마리라는 섬으로 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가 연착이 되는 바람에 시간이 많아 주변 현지인들과 얘기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허기가 와서 빵을 사 먹으러 근처 작은 구멍가게에 갔는데, 혼자 먹을 빵 하나 사는 것보단 사람들과 나눠 먹을 수 있는 과자를 여러 개 사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고, 빵을 사 먹을 돈으로 막대 과자를 잔뜩 사서 선착장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곧 배가 도착했고 사람들과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분이 조심스레 제 옆자리로 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 여자분의 이름은 바네사였는데, 섬으로 가는 동안 바네사와 여러 대화를 했고, 바네사는 저를 자신의 집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줬습니다. 그녀는 제가 그 섬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부터 열까지 가족처럼 챙겨줬습니다.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예상하지 못한 친절에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바네사에겐 왠지 묻고 싶었습니다.
“바네사, 너는 그때 왜 나를 도와준 거야? 배에서 짧게 대화한 사이일 뿐이잖아.”
“네가 선착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멀리서 봤어. 이미 그때 너에게 마음이 열렸던 것 같아. 멀리서도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향기가 느껴졌어. 배에서 먼저 말을 걸었던 것도 그 때문이야.”
바네사의 말대로 저에게 약간의 향기가 느껴졌다면 그건 아마 케냐에서 만난 로즈메리 아줌마가 제게 준 선물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순간순간 만나는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고 향기롭게 행동한다면 그 향기는 저를 좋은 길로 인도하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향기라는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작은 틈새만 있어도 흘러 나가고, 아무리 넓은 공간이라도 채울 수 있으며, 강한 그 원천만 있다면 거리에 상관없이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때마침 바람도 함께 불어준다면 그 영향력은 더 넓어집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향기를 가지고 계시나요?’
광활하고 소름 돋는 대자연의 예술 앞에서 한없이 작아짐을 느끼며 겸손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결과 22개월 동안 46개국을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 이야기를 400여 장의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니, 여행을 준비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처음 혼자 그림을 그리며 세계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안되는 이유만을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되는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여행을 하면, 그 낯섦 속에서 온전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이런 뜬구름 잡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행을 떠났고 이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제 삶의 주인공인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인생에서 가장 가슴 떨리는 순간이 얼마나 있으셨나요? 이루고 싶은 어떤 꿈이 있으신가요? 누군가는 이미 멋진 도전을 해보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인생에 있어 새로운 꿈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도 있으시겠죠.
누구에게나 이렇게 긴 여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또 꼭 자신의 꿈을 여행과 관련지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쁘게 달려가시는 발을 잠시 멈추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잠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라도 현재와는 다른, 여행 같은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김물길 화가 매일 보고 느낀 것을 그리는 ‘아트로드’ 프로젝트를 기획해, 673일 동안 5대륙 46개 나라를 여행하며 400여 장의 그림을 그렸다. 그 결과물로 그림 여행 에세이 <아트로드>를 출간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 ‘국내 아트로드’라는 이름으로 전국 곳곳을 여행하며 계절과 사람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