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글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이순신 장군은 해군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 그런데 장군이 한때 소총(승자총통) 부대의 소대장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북병사 이일(1538~1601)의 모함으로 첫 번째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있던 1588년(선조 21) 1월 27일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두만강 상류 녹둔도를 점거한 여진의 시전부락을 토벌할 때 승자총통 등으로 무장한 소대를 이끌고 참전해 공을 세웠다. 당시 토벌내용을 그린 그림에 ‘우화열장’(승자총통 소대장) 직함의 이순신 이름이 적혀있다.
그로부터 410여 년이 지난 2012년 11월, 전남 진도 고군면 앞바다에서 명문 총통(개인 화약 무기) 3점이 인양됐다. 총통 3점은 길이 57.3~57.8 cm, 무게 1,920~2,020 g, 총구 내경이 1.3 cm로 거의 일정했다. 총통에 새겨진 명문은 ‘만력 무자년(1588년·선조 21) 4월(전라) 좌수영에서 만든 소소승자총통···장인 윤덕수(萬曆戊子 四月日左營 造小〃勝字···匠尹德水)’라는 내용이었다. 3점의 총통 안에 흙과 종이, 화약 등이 확인됐다. 종이는 화약에 불을 잘 붙게 만들고 화약을 다져주려고 넣는다. 흙은 폭발가스의 누출을 막으려고 약실과 총열 사이의 틈을 메워준 진흙(토격)의 잔재다. 임진왜란 당시 지자총통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돌 탄환(석환·石丸) 6점과, 기계식 활(쇠뇌)의 부속품인 방아쇠(노기)도 인양됐다.
2012년 명량대첩 해역인 전남 진도 고군면 앞바다에서 인양된 조선시대 총통 3점에는 ‘소소증자총통’이라는 명칭과 함께 1588년 4월 전라 좌수영에서 장인 윤덕수가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인양된 소소승자총통은 이순신 장군이 한 때 소대장이었던 소총부대의 주력 무기인 승자총통 계열이다. 전라·경상 병사를 지낸 김지(1540~?)가 개발했다. <선조실록>은 “작고한 병사 김지가 만든 승자총통이 북방의 사변에서 적을 물리칠 때 많은 힘이 되고 있다(1583년 6월 11일)”라고 썼다. 즉 승자총통의 위력은 1583년 1~8월 여진족 3만여 명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한 ‘니탕개의 난’ 때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선조실록>은 “종성부성 위의 조선군이 승자총통을 비 오듯 퍼부으니 성 아래로 몰려오던 오랑캐가 패주했다(1583년 5월 17일)”라고 기록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다양한 소형화기를 제작했다. 화약 추진체로 화살 2개, 4개, 8개를 한꺼번에 쏘는 쌍전·사전·팔전총통 등 일발다전 총통을 개발했다. 화살 100발을 한 번에 쏠 수 있는 다연장 로켓 발사기(신기전기 화차)와 사전총통 50개 이상을 장착해서 화살 200개 이상을 동시에 발사하는 사전총통기 화차도 개발했다. 또 이시애의 난(1467) 이후 개발한 신제총통과 복전총통, 육총통, 주자총통, 측자총통 등이 있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 개발된 개인화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화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지의 승자총통은 달랐다. 주로 쇠 탄환(철환)을 쏘기 위해 제작된 개인 소총이었다. 승자총통은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고 손으로 화약선에 불씨를 붙여 3~15발에 달하는 쇠 탄환을 발사하는 구조였다. 기존의 화살 총통에서는 터지는 화약이 새어 나가지 않고, 발사하는 힘을 몰아주기 위해 격목(나무 장치)을 끼워 넣었다. 그러나 승자총통에서는 격목 대신 토격(진흙)과 종이를 쇠탄환과 함께 다져 넣었다. 발사 보조장치가 격목에서 토격(진흙+종이)으로 바뀐 의미는 컸다. 진흙만 있으면 되었기에 발사 때마다 격목을 구하고 다시 끼우느라 낭비했던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장전 시간이 한결 빨라지게 됐다.
총신도 기존 총통보다 2~3배 길어져 사거리도, 정확도도 개선됐다. 화약 1냥으로 철환 15개를 발사하는데, 사거리가 750 m에 달했다. 조선 조정은 이후 차승자·소승자·중승자·대승자· 별승자 총통 등 다양한 승자총통 계열의 무기를 개발·제작했다.
1. 임진왜란 당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돌 탄환(석환·石丸)도 6점 확인됐다. 지름 8.5~9.8 ㎝ 정도인 석환은 대형화포 중 하나인 지자총통(地字銃筒)에서 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지지대를 갖춘 기계식 활(쇠뇌)의 부속품인 방아쇠(노기)도 인양됐다. /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2. 1570~1580년대 전라·경상 병사를 지낸 김지(1540~?)가 개발한 신무기인 ‘승자총통’. 개발되자마자 1583년 1~8월 이어진 ‘니탕개의 난’에서 큰 효험을 보았다. 조선군은 성문 앞으로 몰려오는 여진족에게 승자총통 세례를 퍼부어 패주시켰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나 승자총통에는 한계가 있었다. 불을 붙인 심지가 타들어 가 화약이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조준사격을 할 수 없었다. 지향 사격만 가능했다. 반면 왜군의 주력화기는 사수가 방아쇠를 당겨 불심지를 화약에 점화하는 조총이었다. 그러한 승자총통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조총의 장점’을 도입한 개량 무기가 있었다. 가늠자와 가늠쇠, 총 받침대(개머리판)를 달아 조준사격을 가능하게 했던 ‘소승자총통’이다.
그렇다고 격발시점을 나름 조절할 수 있던 조총의 성능은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승자총통의 장점도 있었다. 한 번에 적게는 3발에서 많게는 15발씩 난사할 수 있었다. 몰려드는 적군을 방어하는 수성전에서 효용가치가 있었다. 행주대첩(1593년 2월 12일) 때 그 위력을 발휘했다. <선조실록>에는 “1만여 명의 왜군이 행주산성을 포위 돌격…대·중·소 승자총 통과 진천뢰 등 각종 화기를 쏘자, 왜군의 전사자가 130여 명, 부상자가 100여 명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2012년 인양된 ‘소소승자총통’은 소승자 계열의 총통이다. 그러나 ‘소승자총통’에서 관찰되는 가늠쇠와 가늠자, 총 받침대 부착장치 등이 보이지 않는다. 당대의 무기 제작자들은 여러 전투 상황에 맞게 다양한 승자총통을 개발했다. 따지고 보면 조총의 장점을 도입했다는 ‘소승자총통’ 역시 한계가 있었다. 당시는 조총처럼 방아쇠를 갖춘 격발장치가 개발되지 못한 때였으니까…. 그러니 1588년 윤덕수 장인은 가늠자와 가늠쇠, 개머리판 설치 장치 등을 없애 무게를 빼고 구경 (3점 모두 1.3 cm)도 줄인 새로운 총통(소소승자)을 개발했을 것이다.
명량해역에서 인양된 소소승자총통은 언제 수장된 것일까. 우선 1597년 9월 7일의 벽파진 해전을 떠올릴 수 있다. 벽파진 해전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 장군의 두 번째 전투이다.
“9월 7일 접근해오는 적선 13척을 공격했다. 달아나는 적선을 쫓은 뒤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밤 10시 적선이 포를 쏘며 공격했다. 나(이순신)는 ‘겁먹지 마라’는 엄명을 내렸다. 내가 탄 배가 적선 앞에서 포를 쏘자 적선이 물러났다.” <난중일기>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 직전(1597년 9월 14일)까지 이곳 벽파진에 주둔했다. 2012년 인양된 소소승자총통 등이 이 벽파진 해전의 와중에, 혹은 그 전후에 수장된 것일 수 있다.
소소승자총통이 인양된 곳은 명량대첩(1597년 9월 16일)의 현장인 울돌목(명량)에서 4.3 ㎞ 정도 떨어진 전남 진도 고군면 일대 해역이었다. 또한 명량대첩의 전초전인 벽파진 해전(1597년 9월 7일)의 현장이기도 하다. /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인양 지점에서 4.3 km 떨어진 울돌목(명량)은 어떨까. 1597년 9월 16일 왜군 130여 척이 울돌목으로 진격하자 조선 수군 13척도 맞서 나갔다.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다”라고 출사표를 던진 이순신 장군은 지자포와 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대며 돌진했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자는 “군사들이 배 위에서 빽빽하게 서서 총통을 쏘아대니 적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라고 썼다. 또 “아군을 포위한 적선 3척에 각종 총통을 빗발치듯 쏘자 3척 모두 전복됐다”라고도 했다. 왜군은 133척 가운데 30여 척을 잃고 패주하고 만다. 명량대첩이었다. 소소승자총통 등도 격전의 와중에 해저로 빨려 들어갔거나 이동 간 빠진 유물일 가능성도 있다.
2012년 출토된 소소승자총통은 언제 수장된 것일까. 먼저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벽파진 해전을 떠올릴 수 있다, 벽파진 해전은 9일 뒤인 1597년 9월 16일 발발한 명량대첩의 전초전 성격으로 치러진 전투이기도 했다.
(박스) “1597년 9월 7일 접근해오는 적선 13척을 공격했다. 달아나는 적선을 쫓은 뒤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밤 10시 적선이 포를 쏘며 공격했다. 나(이순신)는 ‘겁먹지 마라’는 엄명을 내렸고, 내가 탄 배가 적선 앞에서 포를 쏘자 적선이 물러났다.”
-벽파진 해전의 <난중일기>-
2021년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소소승자총통 3점을 보물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심의기구인 문화유산위원회가 두 번이나 ‘보류’ 판정을 내렸다. 첫 번째 보류 이유로 꼽은 ‘과학적인 조사의 필요성’은 2023년 12월 완료됐다. 소형총통의 주조는 거푸집을 반으로 나누어 맞추고, 총구 내부를 만들기 위해 코어(내형)를 사용한다. 그런 다음 거푸집과 코어 사이에 쇳물을 부어 총통을 제작한다. 주조 때 코어가 한 가운데 정확하게 서 있지 않으면 총신이 비뚤어진다. 이것을 막기 위해 코어를 고정하는 맞물림 쇠(M, L자형)를 설치한다. 주조 때 이 코어 받침쇠가 설치된 채로 쇳물을 붓기 때문에 총통의 기벽 속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CT 조사 결과 발굴 인양된 소소승자총통 3점에서 그런 코어 받침쇠가 보였다. 가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품 인정’까지 받았는데도 보물 지정이 보류되는 진짜 이유가 있을까. 1992~1996년 일어난 ‘가짜 총통’ 사건의 망령 때문일 것이다. 19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인양했다는 ‘귀함별황자총통’이 10여 일 만에 국보로 지정됐다.
‘거북선에 장착한 화포’라는 명문이 확인됐다니 국보로 평가받을 만했다. 그러나 이 총통은 어이없게도 4년 만인 1996년에 국보에서 전격 해제된다. 승진에 눈이 먼 해전유물발굴단장(대령)이 가짜 총통을 바다에 밀어 넣고는 이를 인양한 것처럼 속인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이 사건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그 때문일까. 국립기관(국립해양유산연구소)이 직접 발굴하고, 과학조사 결과 진품으로 확인된 소소승자총통의 보물 지정이 늦어지고 있다. 기막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