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안인모 피아니스트

클래식과 친구가 된다면

출근길 인파로 꽉 들어찬 지하철.
시작부터 이미 지치는 하루.
업무와 씨름하며 발생하는 감정 소모와 상처들에 억울하고 속상하기도 하죠.
배려받지 못한 거친 말들에 아프기도 할 거고요.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고 어둑한 길에 섭니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한 하루라면 좋으련만, 몸도 마음도 지친 채 휴대폰을 열지요.
굳이 뭔가를 누르지 않아도 저절로 재생되는 영상들은 끝없이 쏟아집니다.
나도 모르는 새 도파민이 분비되고 그것들은 우리를 즉각적인 쾌락에 빠뜨려요.
무언가를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흐르는 영상들은 집중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하지요.
마치 지친 하루의 끝이 즐겁게 마무리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하루하루는 매일 되풀이됩니다.

우리는 잠들 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 주는 친구로 착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안 봐도 그만인 영상으로 채우다 보면, 공허함이 더 커질 뿐입니다. 다음날 딱히 기억나지 않는 그것들은 친구처럼 나를 토닥여준 것은 아니니까요.

인생은 계획대로 흐르지 않기에 한편으론 흥미진진하기도 한데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이 흔한 문장은 한 번의 인생에 후회와 미련을 줄이는 유일한 ‘최선’이기도 합니다. 저는 피아니스트로 무대 위 또는 교단에 서는 것을 소망하며 그 길만이 유일한 길로 여기고 살았는데요. 살다 보니 인생길에는 수많은 갈래 길이 있더랍니다. 어느 날 뜻밖에도 클래식 방송을 맡게 되었고 많은 분과 소통을 한 지도 8년 차가 되었습니다. 저도 가끔은 스트레스를 받는데요. 주로 시간 부족으로 오는 압박이 크답니다. 제게 클래식 음악은 직업이니,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클래식을 귓가에 두고 있어요. 그렇게 종일 들으면서도 힘들 때 찾는 친구도 역시 내 곁에 있는 클래식이고, 끝없는 영감과 환희를 주는 것도 클래식입니다.

음악은 온전히 들어야 하기에 절대적인 시간을 ‘청취’에 바쳐야 합니다. 투자해야 할 시간 비용이 높다보니, 무턱대고 즐기기엔 시간 대비 효율이 낮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실은 클래식도 다른 장르와 다를 바 없어요. 어디 특별한 곳에서 시간을 정해두고, 비싼 값을 치르며 즐기는 것이 아니랍니다. 클래식도 바로 우리 삶 속에서 누려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일상’과 ‘클래식’을 잘 엮어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은 엄마 뱃속에서 만날 수 없는 태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들려주는 것’이죠.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은 태아의 정서뿐 아니라 두뇌 발달에도 좋아 태교 음악으로 애용되고 있지요. 이렇듯 음악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아가와도 소통할 수 있는 멋진 것입니다. 언어나 문화를 뛰어넘은 만국 공통 언어인 것이죠. 어쩌면 머나먼 우주 밖의 외계생명체와도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1970년대에 쏘아 올린 보이저 1호와 2호에는 지구를 소개하는 다양한 소리를 담은 골든 레코드가 탑재돼 있습니다. 지구인들의 다양한 인사말뿐 아니라 아기 울음소리, 그리고 음악도 들어 있지요. 그중 클래식에는 음악의 아버지인 바흐부터 음악의 신동이었던 모차르트, 그리고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는 베토벤의 명곡이 들어 있습니다. 외계 행성에서 골든 레코드를 들은 외계인들에게 바흐의 음악은 어떻게 들릴까요?

마실 것을 사러 들른 편의점, 잠시 쉬려고 정차한 고속도로의 휴게소, 그리고 친구를 만나러 들어간 카페 등등 그 어떤 장소에 서든 우리는 음악을 듣게 됩니다. 그 어떤 곳도 조용히 침묵하는 곳은 없는데요. 내가 원치 않으면 듣거나 보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갖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듣게 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나를 위해 꼭 챙겨 들어야 하는 음악 처방전을 플레이리스트로 만들어 두면 어떨까요?

노래는 가사가 있다 보니 가요를 들으며 느끼는 감정은 각자가 아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클래식 중, 가사 없이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의 여지를 줍니다. 그 모호한 아름다움에 빠지게 되고, 또 클래식의 절대적으로 긴 연주 시간을 견디며 집중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마침내 이 음악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지게 되죠. 인간이 갖는 여러 소중한 감각 중 청각은 특히 스트레스나 피로도와 직결되기 때문에, 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듣는 행위는 귀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피부로도 이루어집니다. 음악을 온몸으로 듣는 경험을 꼭 해보시길 바랍니다.

지친 하루의 끝,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달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달은 내가 한 번 올려봐 주기만을 종일 기다리고 있었지요. 나와 눈이 마주친 달은 날 위해 밝혀진 달입니다. 달빛이 머리 위에 쏟아내 주는 그 따스한 위로를 받아 보세요. 귀를 통해 들어온 차분한 피아노 선율, 클로드 드뷔시의 ‘달빛’은 따뜻한 이불을 덮은 듯, 피부를 덥혀주고 온 마음이 이내 편안해집니다. 달빛의 포근함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됩니다. 부서질 듯 연약한 달빛의 목소리가 온 사방에 느껴집니다.

선율을 따라가던 우리는 드뷔시가 놓은 ‘음향 효과’라는 덫에 걸리고 마는데요. ‘느리게, 극도로 섬세하게 연주하라’고 써 놓은 드뷔시의 지시어에 따라, 피아니스트는 손끝으로 섬세하게 소리를 빚어내며 조심스런 피아노 페달과 함께 아찔한 음향을 들려줍니다. 나는 누구인지, 내 마음은 무엇을 원하는지, 내 마음의 구석구석을 달빛으로 들여다보세요. 달빛의 위로에 내 마음은 환해집니다.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은 나만의 시간을 꼭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안인모 피아니스트, 클래식 연구가
방송 <클래식이 알고 싶다>를 기획하고 진행하며 클래식과 일상을 연결하고 있다. 도서 <클래식이 알고 싶다>, <루브르에서 쇼팽을 듣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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