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과학읽기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사진제공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노벨상, AI
그리고 채피

영화 <채피>의 포스터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AI, 꿈꾸던 미래에 다가서다

AI 연구에 봄날이 왔다. 스웨덴의 노벨상위원회는 202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평생을 인공 신경망 연구에 바친 존 홉필드(John Hopfield, 91) 프린스턴대 교수와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 77) 토론토대 교수를 선정했다. 존 홉필드 교수는 패턴을 저장하고 재구성하는 ‘홉필드 네트워크’를 발명했고, 제프리 힌턴 교수는 이를 이용하여 기계를 학습시키는 ‘볼츠만 머신’을 개발했다.

과학 부문 노벨상이 평생의 연구를 종합하여 수상자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어, 이번 수상자의 연령을 보면 AI 개발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고 험난했는지를 방증한다.

202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존 홉필드(좌), 제프리 힌턴(우) ©Wikimedia Commons

1956년 다트머스대학에서는 ‘지능을 가진 기계’를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학자들은 AI(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인간의 두뇌 구조에 착안한 인공 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 모델도 등장한다. 당시에는 모든 규칙을 상황에 따라 인간이 넣어 주어야 했다. 간단한 규칙은 가능했고 제법 잘 작동하는 케이스도 있었지만,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기에는 무리였다. 그 후 30년 동안, AI 연구는 암흑기에 빠져들게 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며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이라는 기계학습의 개념이 정립되면서 AI 연구는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 이제는 규칙을 인간이 입력하지 않고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는 단계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시스템의 성능과 학습 데이터의 축적이 부족했다. 아직도 AI 연구의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공신경망은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한다. 2010년 스탠퍼드대학에서 약 1,000만 장의 이미지를 1,000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AI 경진대회인 이미지넷 대회 (ILSVRC)가 열렸다. 처음에는 인간이 분류하는 것의 72 % 수준의 성과를 보여주더니 2년 뒤인 2012년에 무려 84.7 %의 정확도로 올라갔다. 이는 이번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제프리 힌턴 교수팀이 엔비디아의 GPU(Graphics Processing Unit)를 사용하는 딥러닝(Deep Learning) 방식을 이용했던 게 주효했다.

이어 모든 팀이 딥러닝 방식을 사용하여 인간을 능가하는 수준의 결과를 보여주자, 이 대회는 2017년에 중단됐다.

2016년 3월에는 AI의 능력을 우리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라는 이름으로 AI인 알파고가 서울 포시즌 호텔에서 이세돌 9단과 대국을 벌였다. 당시 이세돌도 자신의 완승을 예상했으나 결과는 4대 1로 알파고의 완승으로 끝났다. 알파고는 대국 전에 스스로 자가 학습으로 3천만 건 이상의 대국을 소화했다. 이 승부로 한국기원은 발 빠르게 알파고에게 명예 9단증을 주었고 AI에 한판이라도 이긴 유일한 인간인 이세돌은 패배의 충격으로 은퇴하게 된다.

2024년, 드디어 노벨상도 더 이상 AI를 무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내비게이션이 운전의 필수품이 되었고 자율주행차가 길을 누비며 챗봇이 기업 콜센터를 차지한 게 현실이다.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의 추천 알고리즘은 고객의 숨은 욕구를 끌어내고 있다. 2022년 ChatGPT가 나오면서 이 제는 생성형 AI가 대세가 되었다. 불법적인 딥페이크 영상도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사람들은 AI에 일자리를 뺏길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미 AI가 소재가 된 영화는 많이 나와 있다. 크게 보면 AI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터미네이터> 시리즈, 의식의 업로딩을 담은 <트랜센던스>, AI의 자아 형성을 소재로 한 <블레이드 러너>, <A.I.>, <아이, 로봇>, <엑스 마키나> 그리고 이를 복합적으로 다룬 <채피> 등이 있다.

인공지능-머신러닝-딥러닝의 관계도 ©Wikimedia Commons: Avimanyu786

학습으로 자아 찾는 로봇 채피

2016년 요하네스버그는 매일 300건이 넘는 강력범죄가 벌어지는 지옥 같은 곳이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됐던 경찰은 로봇 경찰인 ‘스카우트’를 도입하고, 현장에 투입하자 범죄는 극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이 와중에 22호 스카우트는 유난히 사고를 많이 당하고 망가진 채로 돌아와 수리하기를 반복한다. 한편, 개발자 인 디온(데브 파텔 분)은 개인 시간을 털어 넣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완벽한 AI를 만들고자 밤을 새워가며 알고리즘을 완성한다. 하지만 테스트를 위해 22호를 이용하려던 순간, 불순한 갱단에 납치되고 22호는 ‘갱스터 로봇 No.1’으로 탄생할 위기에 처한다.

갱단은 초기 데이터가 없는 22호를 꼬마 녀석이란 뜻의 ‘채피’라 이름 붙이고 자기들 방식으로 교육한다. 채피는 이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학습하고 TV, 책 그리고 현실을 마주하면서 점점 세상을 배우고 자아를 만들어 나간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게 되고 뛰어난 습득 능력을 보여준다. 창조자인 디온의 교육과 갱단과의 생활 속에서 이것저것 겪으며 성장하다가 자신도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갈등하게 된다.

이때 경쟁 개발자 빈센트(휴 잭맨 분)의 음모로 채피는 생사의 갈림길에 처하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자기의 유한한 생명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의식을 다른 로봇에 이식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의 감독을 맡은 닐 블롬캠프(Neill Blomkamp)는 <디스트릭트 9>, <엘리시움>으로 제법 알려진 감독이다. <채피>에는 휴 잭맨, 시고니 위버 등 쟁쟁한 배우가 출연했지만, AI와 로봇, 갱단을 엮은 산만한 구성과 진부한 스토리로 기대에 못 미쳤다. 하지만 AI와 머신러닝이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잘 버무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SF 영화이다. 게다가 <인터스텔라>의 음악을 담당한 한스 짐머(Hans Zimmer)의 OST는 덤이다.

고뇌하는 채피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일부에서는 이번 노벨물리학상의 선정에 의구심을 표시하기도 한다. 두 수상자의 학문적인 배경을 전통적인 물리학으로 보기 어렵고 인공신경망의 개발에 물리학의 공헌이 있었느냐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학문 간의 경계가 없어지는 시기에 앞으로도 과거의 학문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이미 노벨화학상은 그렇게 된 지 오래다. 마침, 이번 노벨화학상 역시 AI를 연구한 학자와 기업체의 CEO, 연구자가 선정되어 노벨상 위원회가 AI의 광풍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회자된다.

노벨상의 선정 기준은 인류의 문명발달에 기여한 사람을 뽑는 것인데, 튜링테스트(Turing Test)를 통과한 AI를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지, 그러면 AI에게 노벨상을 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AI 연구가 여름으로 갈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갱단에게 배우는 채피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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