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글 정종인 새전북신문 논설위원·첨단방사선연구소 시민기자단 단장
‘문필봉’ 아래 웅비의 나래를 펴고 비상하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의 미래를 향한 박진감 넘치는 도약에 시민들의 격려와 응원이 무르익고 있다. 정읍 시민들은 20여 년 전부터 첨단방사선연구소 등 국책기관들과 첨단산업단지가 들어선 모습을 보고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한다고 말한다. 최근 취재현장에서 RFT 산단 조성 시기에 소통의 아이콘이 된 한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읍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 객지에서 생활하다 낙향한 지 거의 30년이 된다는 이인수 옹(翁)이 화제의 인물이었다. 이인수 옹은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잠시 요양차 내려왔다가 고향이 좋아 여태껏 살고 있다. 2005년 정읍은 매우 시끄러웠다. 정부출연연구소인데 방사선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서울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 마을 정읍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자연과 사람 그리고 과학이 함께 할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시기였기에 연구소 유치를 놓고 큰 갈등을 빚었다. 이 옹은 그런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급기야 본인이 직접 나서 주민협의회를 조직하고 연구소 유치 운동을 전개했다.
이 옹은 인근 8개 마을 200여 가구 주민들의 중심이 되어 주민들을 설득하고 때로는 연구소 관계자들과도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배운 연구소의 미래 가치를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전령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때로는 주민들을 데리고 대전의 한국원자력연구원을 방문하고 직접 첨단 과학 서적을 보며 공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 옹은 대전의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스무 번은 방문했을 정도였다.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만, 이 옹은 고통을 견디며 국책기관 유치에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결국 이 옹이 중심이 된 주민협의회의 노력을 통해 국가에서 필요한 국책기관이자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연구기관인 첨단방사선연구소가 정읍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연구소 준공식에서 이 옹은 과학기술부 장관상을 받았다.
한동안 이 옹을 찾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요즘은 뜸해졌다. 거의 20년이 흐른 지금 이 옹을 기억하는 연구소 직원들은 거의 없다. 다만 그가 기증한 꽝꽝나무 한 그루가 말없이 의연하게 과거를 품에 안고 연구소 한 켠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첨단방사선연구소의 발자취와 시민들과의 오작교 역할을 위해 첨단방사선연구소 시민기자단이 출범한 것은 이 옹에게 큰 위안이 되고 있다. ‘바람처럼’ 이제 세월이 흘러 아흔의 나이에 접어든 이 옹은 “20여 년을 훌쩍 넘긴 그 세월 속에 기억할 일들이 많다는 것을 연구원들과 직원분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라며 “과학과 기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런 활동들이 경쟁력 있게 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국민의 관심과 응원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아흔을 넘긴 이 옹에게서 이타적 삶의 지혜와 인내의 교훈을 담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