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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유용하 서울신문 과학전문기자
한국과학기자협회 회장
매년 10월이 되면 전 세계인의 시선은 북구의 두 도시로 쏠린다.
바로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스웨덴과 노르웨이로 말이다.
노벨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노벨과학상과 문학상, 노벨을 기념하기 위한
스웨덴 중앙은행상(노벨경제학상)은 스웨덴에서 발표한다.
다른 어느 때보다 올해 노벨상은 한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국인으로 처음이자, 아시아 여성으로 처음 한강 작가가 선정됐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노벨위원회를 고려한다면 올해 노벨과학상 수상 업적도 파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는 예상했고, 누군가는 설마 하는 생각을 가졌던 인공지능(AI) 관련 연구자들이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휩쓸었다. 올해 노벨 과학상 수상 업적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자.
올해 생리·의학상은 마이크로RNA(miRNA)를 동물에서 처음 발견하고 작동 원리를 규명한 빅터 앰브로스 미국 매사추세츠대 의과대학 교수와 게리 루브쿤 하버드대 의과대학 교수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1993년 예쁜꼬마선충이라는 동물로 실험하던 중, lin-4라는 유전자가 lin-14라는 메신저 RNA(mRNA)와 결합해 lin-14 유전자 발현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이 발견한 lin-4가 최초로 발견된 miRNA이고, 추가 연구를 통해 lin-4 가 lin-28 유전자 발현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자들은 단순히 예쁜꼬마선충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이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연구 범위를 확장했다. 그 결과, 2000년에 또 다른 miRNA인 let-7을 발견했다. 이 마이크로RNA는 예쁜꼬마선충은 물론 인간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진화적으로 보존돼, 세포 내에서 핵심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의 발견 이후 다양한 분석 기술의 도움으로 현재까지 1,000여 개의 마이크로RNA가 인간에게 발견됐고, 4만 개가 넘는 마이크로RNA 유전자가 271개의 생물체에서 발견됐다. 이번에 수상한 연구 업적은 전형적인 유전학 연구로 순수 기초과학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이들이 연구한 miRNA는 암, 신경계 질환, 심혈관질환 등 다양한 질병의 발병과 진행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새로운 진단과 치료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왼쪽부터) 생리·의학상 - 게리 루브쿤 교수, 빅터 앰브로스 교수 / 물리학상 - 존 홉필드 교수, 제프리 힌턴 교수
올해 물리학상 수상자는 존 홉필드 미국 프린스턴대 분자생물학 교수와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AI가 지닌 연산 능력의 핵심인 인공신경망을 통한 기계학습(머신러닝)의 초기 모델을 고안한 연구자들이다. 이들이 수상자로 발표됐을 때 취재진은 물론 대중은 인공지능 초기 모델 연구와 물리학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궁금증을 가졌다.
홉필드 교수는 고체물리학자로 시작해 생물학으로 건너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이른바 융합 연구자다. 그는 뇌의 기억 회상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홉필드 네트워크’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홉필드 네트워크는 신경생물학과 분자물리학의 원리에 기반한 초기 인공신경망 모델이다. 이 이론은 신경 세포의 상호작용을 통해 기억을 형성하고,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를 통해 컴퓨터가 노드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기억하고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가 하면, 힌턴 교수는 홉필드 네트워크를 확장한 ‘볼츠만 머신’을 제안한 연구자다. 볼츠만 머신은 인공신경망에서 각각의 정보를 받아내는 연결점을 복잡한 거미줄처럼 구성하고, 연결점은 드러난 점과 숨겨진 점으로 구분된다. 볼츠만 머신은 숨겨진 점을 활용해 알고리즘 계산 효율을 높이고 네트워크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현재 사용되는 챗GPT나 이미지 생성형 인공지능 모델은 이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올해 노벨과학상의 하이라이트는 화학상이었다. 화학상 업적의 절반은 컴퓨터를 활용한 단백질 설계 연구를 개척한 데이비드 베이커 워싱턴대 교수, 나머지 절반은 단백질 구조 예측 AI 알파폴드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 CEO와 존 점퍼 연구원에게 돌아갔다.
베이커 교수는 자연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맞춤형 단백질을 설계하는 연구를 했다. 그는 아미노산 서열로부터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예측하는 방법을 탐구해 ‘로제타 폴드’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베이커 교수는 새로운 구조를 가진 단백질을 설계하고 로제타 폴드로 그 구조에 맞는 아미노산 서열을 찾아냈다. 이 서열을 코딩하는 유전자를 박테리아에 넣어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고, X선 결정법으로 이 단백질의 구조를 확인한 결과 컴퓨터가 설계한 구조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사비스와 점퍼가 개발한 알파폴드는 단백질 구조 데이터 베이스를 기반으로 단백질 3차원 구조를 예측할 수 있다. 단백질 구조 예측의 정확도는 초기 모델의 60 %에서 90 %까지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계산생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알파폴드로 예측된 단백질 구조는 2억 개를 넘었다. 이는 인간이 직접 실험해 축적한 20만 개의 구조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 때문에 현재 전 세계 200만 명 이상의 연구자들이 알파폴드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생리의학상뿐만 아니라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 업적들도 사실 기초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올해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의 대폭 삭감으로 순식간에 연구 기반이 무너졌다고 한탄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언감생심 아무도 하지 않는 기초연구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노벨평화상과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보유한 한국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언제 나올 수 있을까.
(왼쪽부터) 데미스 하사비스 CEO, 존 점퍼 연구원, 데이비드 베이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