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580년 만에 ‘갑툭튀’한 장영실 인적사항,
정말 가짜뉴스일까

1999년 문화재청이 펴낸 <궁중현판> 도록에 의미심장한 현판 1점이 소개됐다.
1858년(철종 9) 창경궁 화재로 탄 주자소를 재건하면서 내건 현판이었다.
현판에는 활자 주조를 감독한 관리들이 언급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계미자(1403)와 경자자(1420), 갑인자(1434) 등을 시작으로 역대 주자소 관리들의 인적사항이었다.
그 중 ‘갑인자’ 주조 담당 가운데 ‘장영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2022년 5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의 현판, 궁중현판’ 특별전에 등장한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
그 현판에 천재과학자 ‘장영실’의 직위(호군)과 자(실보), 탄생 연도(계유·1393), 본관(경주)가 적혀있었다. / 국립고궁박물관, 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자료

12자의 단서

    2022년 5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의 현판, 궁중현판’ 특별전을 둘러보던 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바로 이 12자에 꽂혔다. ‘호군(정 4품) 장영실’과 함께 ‘자(字·다른 이름)=실보(實甫)’, ‘태어난 해=계유(1393년)’와 ‘본관=경주’가 적혀 있었다. 겨우 12자가 무슨 대수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장영실이 누구인가. 자격루(물시계)와 일성정시의(해·별시계 겸용 시계), 해시계(앙부일구), 천문관측대(간의대) 등을 발명했거나 제작 및 실무를 책임진 인물이다. 그러나 장영실과 관련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출세 이후의 행적은 <세종실록>에 실려있지만, 태어난 해도, 어린 시절도 알 수 없다. 원나라(소주·항주) 출신 아버지와 동래현 관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관노라는 이력(<세종실록> 1433년 9월 16일, 1434년 7월 1일)만 남아있다. 말년의 행적도 묘연하다. 1442년 세종이 타는 가마(안여)가 부서진 책임을 지고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마지막이다.

12자의 검증 작업

    현판 내용을 짚어보자. 장영실이 ‘호군’을 역임한 것은 ‘1433년 9월~1438년 1월’이다.
    ‘갑인자’가 제작된 1434년(세종 16) 그 무렵이다. 현판은 또 장영실의 자, 즉 다른 이름을 ‘실보(實甫)’라 했다. ‘출생 연도=계유(1393년)’는 어떤가. 사실이라면 ‘미상’으로 소개되는 장영실의 생몰년 가운데 ‘생년’은 해결된다. 또 현판에서 장영실은 ‘경주 장씨’ 가문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장영실은 ‘아산 장씨’로 알려져 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도 경주 지역 성씨 중에 ‘장(蔣)’ 씨는 보이지 않는다. ‘경주 장씨’가 맞다면 원나라 출신인 장영실 가문이 ‘경주 장씨’ 성을 하사받았을 수도 있다. 그랬다가 장영실의 행적이 묘연해진 뒤 그 후손이 ‘아산 장씨’에 기대어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갈수록 커지는 의심

    그러나 현판과 각종 문헌·사료를 비교 검토하던 강민경 학예사는 갈수록 벽에 부딪혔다.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대목이 여럿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이 현판이 걸린 제작되고 내걸린 18~19세기와 장영실이 활약한 1430년대와는 350~400년의 차이가 생긴다. 그러니 옛 인물의 프로필이 정확하겠느냐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강민경 학예사는 현판의 등장인물 인적사항과 족보, 실록, 과거급제자 명단(<등과록>, <국조문과방목>), <국조보감>, <해동명신록> 등을 비교했다. 그 결과 현판과는 상당 부분 달랐다.
    예컨대 조선 전기의 과학자인 이천(1376~1451)의 경우를 보자. ‘예안’으로 알려진 이천의 본관이 현판에는 ‘계림(경주)’이라 했다. ‘밀양 변씨’이며, ‘1369년생’인 변계량을 두고도 현판에서는 ‘수성인’이자 ‘1346년(병술년)’ 생이라 했다. 변계량의 경우 ‘자’가 ‘거경’(<등과록>)으로 알려졌는데, 현판에는 ‘숙미’라 했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판이니 현판에 등장하는 장영실의 인적사항도 믿기 힘든 상황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장영실 등 현판 등장인물의 인적사항을 아무런 근거 없이 새겨 넣었을까. 게다가 몇몇 이름 밑에 일부 항목(출생연대, 본관, 자)을 공란으로 남겨둔 것도 심상치 않다. 여기서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술이부작(述而不作)’ 구절이 떠오른다.
    “서술하되(述而) 지어내지 않는다(不作)”는 의미, 즉 ‘전해지는 대로 쓰되, 멋대로 창작·가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밖에 “의심스러운 것은 공백으로 남겨둔다”(<논어> ‘위령공편’)는 ‘공자왈’도 있다. 그렇다면 어떨까. 현판을 쓴 자가 ‘없거나 혹은 사실과 다른 내용’을 검증 없이 새겨넣었을까. ‘공자의 필법’을 따라 ‘의심스러운 부분을 공란으로 남겨두는’ 센스까지 발휘했는데…. 분명 이 현판을 제작할 때 보고 쓴 자료가 있었을 것이다. 혹시 대대로 내려오는 ‘주자소 선생안(역대 관리 명부)’ 같은 자료가 존재했을까.

세종을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한 일말의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회의감이 든다. 잘못된 자료로 괜한 호들갑을 떤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12자의 인적사항이 얼마나 알토란 같은 신상정보인지 가늠할 수 없다. 장영실은 중국인(원나라) 아버지와 조선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가정’ 출신이었다. 다만 노비 출신 어머니 때문에 그 역시 동래현의 관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종께서도 보호했고 나(세종)도 역시 아꼈다”(<세종실록> 1433년 9월 16일)는 언급에서 보듯 두 임금(태종,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고속 출세했다. 특히 세종은 장영실에게 “중국에 가서 각종 천문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으로 익혀와서’ 모방해서 만들라”는 밀명을 내린다. 장영실은 그렇게 눈으로 배워온 실력으로 자격루(물시계)를 발명해낸다.
    세종은 “원나라가 만든 물시계보다 훨씬 정교한 물시계(자격루)를 만들었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종은 장영실에게 호군(정 4품)의 관직을 내려주었다.(<세종실록> 1433년 9월 16일) 덕분에 “장영실은 세종의 위대한 발명을 위해 태어난 인물”(<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 등)로 꼽혔다.

임금의 가마를 부러뜨린 죄

    그러나 대호군(종 3품)으로 승진한 장영실의 ‘급 퇴장’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1442년(세종 24) 장영실이 제작·감독한 안여(국왕 전용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곤장 100대의 형벌에 처해졌다”(<세종실록> 3월 16일, 4월 27일)는 기사가 잇따른다. 물론 임금이 타는 가마를 부실 제작했다면 그 죄는 절대 가볍지 않다.
    그렇지만 장영실이 아닌가. 그동안의 공적을 감안한다면 사면해 주던지, 아니면 가벼운 형벌로 경감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세종은 겨우 2등을 감형해서 곤장 80대로 20대 줄여 주었다. 무슨 곡절이 있었기에 세종은 그토록 총애했던 장영실을 헌신짝 버리듯 버렸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후 장영실은 천문기기 발명가나 과학자가 아니라 악기 제조자인 기술자(장공·匠工)이나 악사(樂師)로 소개될 뿐이다.(<중종실록> 1519년 2월 2일, 7월 7일)

1. 장영실은 1442년 그가 감독·제작한 안여(임금의 가마)가 무너지고 부러지면서 불경죄로 곤장 100대 형을 받았다.
세종은 2등을 감경해주었지만, 그의 직첩을 거두고 곤장 80대 형을 집행하도록 허락한다. 이후 장영실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2. 임금이 타고 가던 가교. 가마채를 말의 안장에 연결하여 두 마리의 말이 앞뒤에서 끌고 가는 가마이다.
임금이나 왕실 웃어른의 장거리 행차 때 이용했다. 화성 행차 시 사용했던 정가교(正駕轎)가 이것과 같은 형태였다. / 국립고궁박물관

비격진천뢰 이장손의 경우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1591년(선조 24) 비격진천뢰를 발명한 이장손이다. 비격진천뢰는 동서양을 통틀어 처음 제작된 일종의 시한폭발탄이다. 무쇠 내부에 설치된 발화 장치(죽통과 나선형 나무에 감은 심지)가 신관(발화) 역할을 해서 폭발 시간을 지연시켰다. 폭발음이 주는 공포감도 대단했고, 파편(마름쇠)이 터져 흩어지니 그 위력도 어마어마했다. 왜군은 이 ‘비격진천뢰’를 ‘충격과 공포’로 여겼다.
    일본 측 기록인 <정한위략>은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 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들이 즉사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작 ‘비격진천뢰’를 발명한 이장손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이장손의 존재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9월 1일에 경주성 전투를 설명하는 말미에, 그것도 실록을 쓴 사관의 ‘괄호()’ 형식으로 등장한다. 아주 작은 글씨로…. “(비격진천뢰는 화포장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었다…500~600보 날아가 떨어져 얼마 있다가 폭발하므로 적진을 함락시키는 데 가장 좋은 무기였다.)” 달랑 이 내용뿐이다. 생몰 연도도, 가문도, 이력도 공백으로 남았다. 어쩌면 그렇게 장영실과 같은 대접을 받았는지….
    이번 현판에 등장하는 ‘장영실 인적사항’이 잘못 새겨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100% 아니라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 현판 내용을 입증할 새로운 자료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런 기회에 조선을 위해 ‘쓰임’ 받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 장영실이나, 혹은 이장손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언급할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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