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글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겨우내 나뭇가지를 장식하고 있던 열매들이 떨어진다.
붉은 호랑가시나무 열매와 보랏빛 작살나무 열매들이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차가운 눈 속에서도 빛나던 색은 미세한 봄기운에 바래버린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은 늘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떠나간다.
이미 겨울이 떠난 지 오래지만 봄의 움직임이 너무 작고 조용해 사람들은 봄이 곁에 와 있는지 모른다. 봄이 왔음을 알려줄 예쁜 봄꽃을 찾으며 애타게 봄을 기다린다.
그러나 사실 그때 어떤 꽃들은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이미 우리 곁에서 만개해 있다. 오리나무의 고요한 꽃들처럼.
오리나무꽃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시든 나뭇잎처럼 누르스름하고 힘없이 흔들린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짜 봄꽃’이 아니다.
우리는 벚꽃이나 유채꽃처럼 예쁜 봄꽃을 기다리며 만개한 오리나무꽃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오리나무꽃은 섭섭한 내색도 없이 제 할 일을 끝내고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나면 드디어 사람들이 열광하는 ‘진짜 봄꽃’들이 잔치를 벌인다. 물론 곱고 화려한 봄꽃도 아름답지만 나는 수줍게 곁에 와 있는 오리나무꽃 같은 봄의 인사도 사람들이 사랑해 주면 좋겠다.
우리는 계절을 나누어 식물의 모습을 기억한다. 꽃 가득한 봄, 초록이 울창한 여름, 단풍이 넘실대는 가을, 앙상한 나뭇가지의 겨울.
하지만 식물을 공부할수록 계절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식물은 계절과 계절 사이에 규정할 수 없는 시간뿐 아니라 매달, 하루하루가 새롭다. 언제나 어제와 다른 오늘의 모습을 보여준다.
생명체는 모두 그렇다. 각각의 종마다 저마다 계획하고 정해진 시간에 제 할 일을 한다. 꽃이 피고 잎이 나며 열매를 맺는 것만이 아니다.
겨울눈의 첫 번째 비늘잎 떨구기, 꽃송이 안에 돌돌 말려있는 꽃술 펴기, 삭아버린 나무껍질 버리기, 꽃가루를 날려 보내기 위해 꽃밥 터뜨리기 등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인사에도 우리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몸짓이 있다.
나는 미국 메릴랜드의 한 연구소에 식물을 연구하러 와서 두 번째 봄을 맞았다. 봄을 앞둔 어느 주말, 한가로이 집 뒤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게 방을 내어준 고마운 미국인 할머니와 그녀의 강아지와 함께 예쁜 집에서 지내고 있다. 강아지는 항상 내달릴 준비를 하고 나를 바라본다.
공이든 나뭇가지든 무언갈 던져주길 바라면서. 그날도 어김없이 내가 바라보고 있는 뒤뜰로 달려와 무언갈 던져달라며 짖어대고 뛰어다녔다.
바람결에 섞여 있는 따뜻한 봄기운을 느끼며 귀여운 강아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할머니가 나타나 뒤뜰에 떨어진 미국풍나무 열매를 줍기 시작하셨다.
우리나라 숲속에 흔히 자라는 참나무나 소나무처럼 이곳 숲속에는 주로 미국풍나무와 튤립나무가 자란다. 한국에서는 이 나무들을 수입해 조경수로 심기도 하지만 흔히 만날 수 있는 종들은 아니다.
미국풍나무 열매는 큰 알사탕만 하고 기하학적으로 반복되는 뾰족뾰족한 돌기와 구멍을 가진다. 흡사 축소해 놓은 태양같이 생겼다.
그 모양이 독특해서 열매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조심히 집에 가져가 장식장에 보관해 두었다. 그 열매에 반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연구소에 처음 도착했을 때 집을 구하는 몇 달간 연구소 숙소에서 보냈다. 숙소에서 여러 나라의 연구자들을 만났었는데 맨 처음 만난 사람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해양생물학자였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내가 식물을 연구한다고 하자 숲속에서 주워 모은 미국풍나무 열매를 꺼내 보이며 무슨 종인지 물었다.
너무 예쁘게 생겼는데 식물이라 인도네시아로 가져갈 수 없어 안타깝다고도 했다. 나는 내가 처음 미국풍나무 열매에 반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가 미국풍나무 열매를 소중히 모아놓은 것이 반가웠다.
나는 할머니에게 미국풍나무 열매가 너무 예뻐 나와 인도네시아에서 온 과학자가 푹 빠져버렸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미국에서 매년 많은 사람이 이 둥글고 딱딱한 열매 때문에 넘어지고 뼈가 부러진다고 얘기하셨다. 이맘때 뒤뜰 가득 떨어진 열매를 치우는 건 너무 귀찮은 일이라고도 하셨다.
안 그래도 작년 크리스마스, 나무뿌리에 걸려 크게 넘어지셨던 할머니는 혹여 또 넘어질까 예민하셨고 매년 뒤뜰을 덮어버리는 열매를 치우는 것에도 신물이 나신 것 같았다.
미국풍나무 열매를 치워야 할 시기는 늘 봄이 되기 바로 직전이다.
나무는 겨울의 거센 비바람에도 열매를 놓아주지 않다가 마치 봄이 시작되면 씨앗을 심는 사람처럼 씨앗을 심기 딱 적당한 때에 땅으로 열매들을 보낸다.
누구에게는 아름답고 누구에게는 귀찮지만 나무에겐 중요한 봄맞이 행사다. 덕분에 나는 이곳에서 식물이 보내는 봄 인사를 하나 더 배웠다.
이른 봄에 일어나는 미세한 식물의 변화뿐 아니라 벚꽃과 유채꽃이 너무 고와서 놓치고 마는 봄의 인사는 다양할 것이다.
봄의 한복판, 봄의 끝자락, 그 사이사이 규정할 수 없는 많은 시간에 촘촘히 나타나는 식물들의 인사.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고, 신비하지 않은 게 없다.
하루하루 모두에게 식물이 주는 크고 작은 추억이 하나씩 쌓여가길 바란다. 이번 봄엔 화려한 봄꽃에 더해 조용하고 수줍은 봄의 인사도 함께 하길.
신혜우_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스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