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글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신라 왕과 왕비, 왕·귀족의 무덤인 대릉원 안에 소문난 ‘포토존’이 있다.
표주박 형태의 쌍분과 목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평일에도 수십 미터 이상 줄을 서는….
그 쌍분이 황남대총(남·북분)이다.
그런데 포토존을 찾는 이들은 저 엄청난 무덤을 대체 어떻게 쌓았는지,
또 저 고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5~6세기 신라 왕과 왕족이 묻힌 경주 대릉원 속 소문난 포토존. 가장 큰 고분(표형분)인 황남대총과 목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관람객들이 평일에도 줄을 서는 곳이다. / 오세윤 사진작가 제공
이른바 대릉원 지구에는 총 60여 기의 고분이 집중되어 있다. 담으로 둘러싸인 대릉원 안쪽에 23기, 그리고 외곽지역에 40여 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 고분의 90 % 이상이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무덤 주인공과 부장품을 넣는 나무 덧널(목곽)을 놓고, 그 주변에 돌을 쌓은 뒤(적석),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구조로 조성됐다. 이런 돌무지덧널무덤의 규모는 소형(밑지름 15 m 이내)에서 초대형(80 m 이상)까지 다양하다.
소문난 포토존인 황남대총(지름 80~120 m, 높이 22~23 m)은 초대형(쌍분)이다. 주인공이 홀로 묻힌 단독분인 봉황대(지름 86.6 m, 높이 21.4 m)와 서봉황대(지름 80 m, 높이 21.3 m)의 규모도 엄청나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이 어마어마한 고분을 어떻게 조성했을까. 경주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의 80 % 이상은 타원형으로 조성됐다. 그런데 이 타원형 고분의 축조에 정교한 수학적 원리가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심현철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특별연구원에 의해 밝혀졌다.
타원형은 2개의 점(초점)을 이용해서 그린다. 신라인들은 무덤을 조성할 바닥에 정한 두 개의 초점에 줄을 고정했다. 그런 다음 그 줄을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막대기를 줄에 걸쳐 움직이면서 그렸다. 그렇게 해서 정확한 타원형 고분이 완성됐다.
고분의 크기는 초점 2개의 거리에 달렸다. 소형분은 짧게, 중대형분은 길게 그렸다. 예컨대 소형분은 묘광(무덤의 관·곽을 넣으려고 판 구덩이)의 양 끝점에, 중·대형분은 돌무지(적석)의 양 끝점에, 각각 두 개의 초점을 설치했다. 신라인들은 이렇게 1500년 전 타원의 형태와 작도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무덤 설계에 적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돌무지덧널무덤을 쌓는 데 얼마만큼의 돌과 흙이 사용됐을까.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2020년 경주 쪽샘 지구에서 발굴된 쪽샘 44호분을 쌓는 데 필요한 돌무지의 양을 계산했다. 쪽샘 44호분의 봉분 규모는 중형급(지름 30 m)이었으나 돌무지의 규모가 금관총·서봉총 등 왕릉급 고분과 맞먹었기에 추산해 본 것이다. 돌의 표본(1 ㎥=수량 298개, 무게 1814.1 ㎏)으로 계산해 보니 쌓인 돌의 수는 16만 4,198개 정도였다. 무게로 잴 경우 992.41 t에 이르렀다. 돌 한 개당 무게는 7~8 ㎏에 달했다. 이미 깎여나간 봉분(흙)은 측정하기 어려웠다.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금관 등 황금유물을 포함해서 모두 3만 5,000여 점이 출토됐다. /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그렇다면 대형 고분은 어떨까. 1973~1975년 사이에 발굴된 황남대총(남·북분)을 살펴보자. 계산해 보니 봉분(흙)의 경우 10만 8,000 t가량 쌓여 있었다. 돌무지의 규모는 4,377 t에 달했다. 5 t 트럭 기준으로 흙은 2만 1,600대, 돌은 875대가 실어 날라야 할 천문학적인 분량이다.
이렇게 많은 양의 돌과 흙으로 쌓았으니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이 도굴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파기만 하면 흙과 돌이 무너져 내리는데 어떻게 도굴할 수 있단 말인가. 덕분에 천마총에서 1만 2,000여 점(1973), 황남대총 남북분(1973~75)에서 5만 6,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왼쪽) 황남대총 남북분 축조에 소요된 흙과 돌은 11만 t이 넘었고, 5 t 트럭 분량으로 2만 2,500대 분량에 달했다. /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오른쪽) 지금까지 연구에 따라 추정해 본 대릉원 지구 내 돌무지덧널무덤의 주인공들. 마립간 시대(356~503)를 풍미한 6명의 왕과 왕비, 왕족의 이름이 다양하게 거론된다. /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고분의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연구 결과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마립간 시대의 산물로 알려져 있다. 마립간은 내물(356~402)·실성(402~417)·눌지(417~458)·자비(458~479)·소지(479~500)·지증(500~514) 등 6명의 임금을 가리키며, 이들이 즉위했던 약 150년간을 흔히 마립간 시대라 부른다.
그러니 황남대총 남북분(98호분)과 봉황대(125호분), 서봉황대(130호분) 같은 초대형 고분의 주인공은 그 여섯 명 중 세 명일 가능성이 높다. 그중 1970년대에 정식 발굴된 황남대총 남북분의 주인공은 혹시 특정할 수 있지 않을까.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금관 등 온갖 황금 유물로 치장한 주인공의 자취가 확인됐다. 그런데 수상쩍은 유물이 속속 드러났다.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긴 채화 가락바퀴(실을 뽑는 도구)가 여럿 확인됐다. 또 무덤 주인공이 착장한 귀고리와 장식 드리개는 모두 굵은고리 귀고리였다.
고고학에서는 보통 ‘굵은고리 귀고리와 은장도, 가락바퀴’ 등은 여성, ‘가는 고리 귀고리’와 ‘둥근 고리 큰 칼’ 등은 남성 상징 유물로 해석한다. 무덤 주인공 성별을 결정짓는 유물이 더 확인됐다. ‘부인대(夫人帶)’가 새겨진 은제 허리띠 꾸미개가 보인 것이다.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금관 쓴 여성’일 가능성이 짙어졌다. 그러나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7세기 전반(632~647)에 등장했다.
그렇다면 북분의 주인공은 누구이고, 남분은 과연 누구의 무덤이라는 건가. 남분에서도 2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주인공은 남성의 상징인 ‘가는 고리 귀고리’와 ‘둥근 고리 큰 칼’을 달고 차고 있었다. 목관 안에서 출토된 인골의 아래턱뼈 등을 분석해 보니 주인공은 60대 전후의 남성으로 추정됐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가 기대했던 금관이 보이지 않고, 금동관이 노출되었다. 남분의 금동관 남성은 북분의 금관 여성보다 위계가 낮은 임금(혹은 왕족)이었단 말인가. 남성 임금보다 신분이 높은 여성이라면 대체 누구였을까.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부인대’ 명(名)이 새겨진 허리띠 장식.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로 여겨진다. /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최근 들어 “남해왕(기원후 4~24)이 왕비(혹은 동생)인 아로에게 제사의 주관을 맡겼다”는 <삼국사기>(‘잡지·제사’조) 기록이 시선을 끈다. 당대 신라에서 왕비와 왕실 여성이 여사제의 역할을 담당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금관이 출토된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이 금동관이 나온 남분의 주인공보다 위계가 높았을 수도 있다.
만약 표주박 형태의 쌍분인 황남대총 남북분이 부부묘라면 어떨까. ‘눌지왕(남분)-아로부인(북분)’ 부부이거나 ‘내물왕(남분)-보반부인’ 부부일 수 있다. 대릉원 지구에는 황남대총 남북분 외에도 90호분, 119호분, 134호분, 143호분 등의 표주박 형태 쌍분이 있다. 이 고분의 주인공 역시 ‘실성왕+아류부인’이나 ‘박제상+치술부인(눌지-아로부인의 딸)’, ‘습보+조생부인’(지증왕의 조부모) 등으로 보는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타원의 형태와 작도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무덤 설계에 적용한 신라인들에게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 1971년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처럼 무덤의 주인공을 밝혔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불어 무덤 조성에 무려 11만 t에 달하는 흙과 돌을 실어 나르느라 뼈가 빠졌을 백성들의 고초를 외면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생고생이 있었기에 1500~1600년이 지난 지금, 신라의 찬란한 황금 문화를 논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을 위안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