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ERI 스포트라이트 ②

김병구
前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자로개발단 단장

한국 표준원전의
효시를 찾아서

아톰 할배들의 영광 3·4호기 방문기

‘효시’란? ‘울릴 嚆’에 ‘화살 矢’로 직역하면 ‘소리 나는 화살’이란 뜻이다.
어원을 찾아보니 고대 전장에서 지휘관의 돌격 개시 신호에서 유래했고,
요즘은 어떤 현상의 맨 처음을 뜻한단다.
우리나라 원전은 최단시일에 기술 자립해 OPR1000에서 APR1400으로 진화,
바라카 해외수출에 성공했고, 향후 SMR도 한국형으로 시장을 넘보는 추세다.
이 기술 자립의 역사가 맨 처음 시작된 곳이 바로 영광 3·4호기 현장이다.
35년 전 영광 3·4호기 건설사업을 총지휘했던 한국전력 박용택 PM, 민계홍 PM, 한국원자력연구원 김병구 PM, 한국중공업(現 두산에너빌리티) 홍영수 PM
이렇게 팔순의 아톰 할배 4인이 30여 년 만에 2024년 5월 2일 영광발전소 현장을 찾아갔다.

영광 3호기 최대 업적을 기념하여 세운 탑 앞에서. 왼쪽부터 홍영수, 박용택, 민계홍, 김병구 초대 사업책임자들

    어째서 영광 3·4호기(원전 11·12호기)를 원전 기술 자립의 효시라 하는가?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1980년대 초 우리나라는 이미 9기 원전을 가동, 운전 중이었다. 경제개발 계획을 뒷받침할 값싸고 풍부한 전원개발로 정부는 방대한 규모의 원전 후속기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더 이상 외국 기술에 매이지 않는 국내 주도의 원전 건설을 위해 필수적인 원전 표준화 사업이 수년간 한전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1,000 MWe급 PWR을 주 노형으로 하고, 600 MWe급 PHWR을 보조 노형으로 정하기에 이른다. 바로 후속기인 영광 3·4호기부터 국제 경쟁입찰로 원자로형을 한번 결정하면, 설계기술부터 제조기술까지 전 분야를 국산화해 국내 주도로 후속기 건설을 이루자는 계획이었다. 이때는 소련의 체르노빌 사고 직후라 국제 원전시장은 공급이 더 많은 이른바 바이어스 마켓(buyer’s market)인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기존의 주기기 공급사인 미국의 Westinghouse, 프랑스의 Framatome, 캐나다의 AECL을 제치고 미국의 Combustion Engineering(CE)사의 System 80 원자로 모델이 표준원전으로 선정된 것이다. 참조발전소는 미국의 Parlo Verde 원전이었다. 국가 보안등급 최상급으로 원자로 계통설계기술의 해외 이전은 극히 꺼리는 핵심기술을 포함하는 계약이었다. 이는 원자로의 우수성, 경제성에 버금가게 CE 측의 획기적인 기술이전 제안이 선정 주요 원인이었다.

    1987년에 이루어진 영광 3·4호기 건설 계약에는 사상 처음으로 국내 업체들이 주계약자로 등장한다. 한국중공업이 원자로/터빈계통, 한국핵연료주식회사(現 한전원자력연료)가 핵연료 공급, 한국전력기술이 플랜트 설계의 주계약자가 되고, 미국의 CE/GE사, Sargent & Lundy(S&L)사가 국내사의 하청업체로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원자로형의 핵심 선정 요인인 NSSS 계통설계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맡게 된 것이다. 결국 CE 노형으로 변경하게 된 근거가 연구원의 순진한 과학자 집단의 기술이전 가능성 판단에 기인하게 된다. 후일, 이 원자로 계통설계 업무는 한국전력기술로 사업 이관하게 된다. 88 서울 올림픽 직후 초유의 국정감사에서 벌어진 야당의 집요한 ‘5공 비리’, ‘축소판 짜깁기’ 공세도, 기술이전(Technology Transfer) 별도 계약으로 주기기 공급 계약금이 10 % 정도 인상된 부분을 야당에서 뒷거래로 잘못 인식한 데서 기인한 듯하다. 근 2년에 걸친 검찰의 수사 결과 영광 3·4호기 계약에는 추호의 부정도 없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계약상 갑의 위치에 선 국내 기술 자립 주체들은 CE/GE나 S&L사들이 신주같이 감싸는 원전 핵심기술들을 과감하게 이전받고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다. ‘5공 비리’를 외치던 야당 의원들이 CE사 Windsor Engineering Center에서 미국 기술진과 일대일로 연수/근무하는 연구원 직원들을 면담하고 나서야 기술 자립의 현실을 인정했다는 일화가 있다. 총 투자 규모 3조 원에 달하는 영광 3·4호기 건설은 예정했던 일정대로 상업 운전에 들어간다. 더욱 의미 있는 결과는 1995년 3호기 준공에 맞추어 기술 자립률도 95 %를 달성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핵연료주식회사, 한국중공업, 한국전력기술 등 기술 자립 주관사들이 핵심기술을 자력으로 설계하고 제작해서 설치 및 시운전까지 하는 목표를 이루었다. 본래 1,300 MWe인 CE 원전을 우리 표준형에 맞게 1,000 MWe로 축소한 OPR1000 원전은 국내에 12기나 지었고, 이를 진화 개량한 1,400 MWe 급 APR1400은 신고리 3·4호기부터 해외 수출된 바라카 1·2·3·4호기까지가 해당하는데, 모두 우리 기술로 확대 설계한 최신형 표준원전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영광 3·4호기 현장을 돌아본 노장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이날의 백미는 제2발전소(영광 3·4호기) 건물 내부에 설치한 역사관 자료실을 돌아보는 아톰 할배들이 탄성을 연발하며 이어졌다. 발전소 건물 내에 역사관을 설치한 원전은 영광 3·4호기가 유일하단다. 1995년 미국 Power Engineering지가 선정한 최우수 프로젝트 상을 필두로 원전 이용률 세계 1위 달성과, 2007년 국내 원전 중 발전량 1,000억 kWh 최단기간 달성 등등 성과도 화려하다. 이 사업을 계기로 후속기는 모두 국내 주계약자로 공급되고, 나아가 해외 원전 건설사업에도 Team Korea로 당당하게 경쟁한다. 21세기 첨단기술은 AI 인공지능과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기술로 천문학적 전기 소모 시대를 예고하며, 원전 기술의 국산화를 선도한 영광 3·4호기 사업의 진가는 갈수록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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