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글
김경일 교수
힘든 한 해가 지나가고 새로운 해가 왔다.
문화심리학자 한민 박사는 한국 사회를 전형적인 고 각성 사회로 진단한다.
무슨 뜻일까?
다사다난한 나라로 좋은 일도 많지만 힘든 일도 매우 많은 사회라는 뜻이다.
그 많은 고난의 대부분은 사람들 때문이다.
주체성과 주인공 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은 위기의 순간에 강한 응집력으로 돌파해 나가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많은 갈등과 스트레스를 서로 주고받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회복탄력성을 자주 필요로 하는 한국 사회에 현대 인지 심리학과 파트너인 뇌과학은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있다.
우리는 몸을 다치면 진통제를 복용한다. 그런데 만약 허리가 너무 아플 때 진통제를 복용하면 그 약효는 허리로 가는 것일까? 상처 부위가 어디든 진통제를 복용하면 그 약효는 상처 부위가 아니라 뇌로 간다. 정확하게는 통증을 느끼게 하는 작고 특정한 뇌 영역으로 간다. 대표적인 영역이 배측전방대상피질(dorsal Anterior Cingulate Cortex, dACC)이다. 왼쪽과 오른쪽 관자놀이에 있는 작은 뇌 영역이다. 이곳의 신경세포들이 활동하게 되면 우리는 고통을 경험한다. 따라서 허리든 무릎이든 특정한 곳이 아파서 진통제를 복용하면 그 약효는 뇌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칼에 찔려서 피가 나거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상처 혹은 크게 어딘가에 부딪혀서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통해서만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훨씬 더 빈번하게 느끼는 고통의 근원에는 바로 사람이 있다. 이를 두고 심리학자들은 육체적 고통에 대비해 ‘사회적 고통(Social Pain)’이라 부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뼈와 살에 상처 하나 없어도 고통을 느끼며 인생을 살아간다. 이별, 갈등, 모욕 그리고 배신 등 사회적 고통의 종류는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최근에 흥미로우면서도 의미심장한 현상이 발견됐다. 사람 때문에 힘든 사회적 고통을 뇌에서는 육체적 상해를 담당하는 영역과 동일한 부위에서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사람 때문에 고통을 겪을 때도 배측전방대상피질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심리학자와 뇌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뇌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거나 뼈가 부러지는 고통과 사람 때문에 겪는 고통을 하드웨어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라고 말이다.
연구자들은 여기서 추가 연구를 진행했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 고통을 느낄 때 진통제를 복용한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를 관찰한 것이다. 놀랍게도 고통을 덜 느낀다는 연구 결과들이 상당수 보고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연구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미국 켄터키 주립대학의 나탄 드월(Nathan DeWall) 교수를 비롯한 연구진은 이별과 같은 사회적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타이레놀 계열의 진통제를 지속적으로 복용케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진통제를 복용한 사람들이 같은 기간 아무것도 복용하지 않은 집단이나 위약(Placebo)을 복용한 집단보다 3주 후 고통과 관련된 감정을 훨씬 더 적게 경험하는 것으로 관찰됐다. 실제로 이런 결과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화제를 넘어 논란이 됐다. 신체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고통 역시 진통제로 완화되는 결과가 관찰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후 다수의 연구가 유사한 결과를 얻은 것으로 보아 충분히 믿을 만한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구를 사회적 고통에도 진통제를 복용하라는 식으로 곡해하시면 절대 안 된다. 연구자들이 강조하고 싶은 본질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별, 갈등, 혹은 배신과 같이 사람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그 사람을 신체적으로 다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배려하며 보살펴 주라는 뜻이다. 특히 신체를 말이다. 그렇게 해야 그 사람의 심리적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서 각종 사건과 사고로 인해 신체를 다친 사람들에게는 그 상처가 눈에 보이기에 따뜻하게 배려하고 보살피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고 최대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 때문에 고통받는 분들에게는 그 10분의 1이라도 배려한다고 자신할 수가 없다. 이런 고통으로 신음하는 분들 역시 몸을 돌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사람 때문에 큰 고통을 겪은 날 나의 ‘몸’을 소중히 돌보는 행위를 필자를 비롯한 많은 심리학자가 ‘심리적 심폐 소생술’이라고 부른다. 심폐 소생술은 무엇인가? 하면 좋은 것이 아닌 꼭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 않으면 우리의 몸과 마음 양쪽 모두가 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돌이켜보면,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체가 회복된 이후에야 용서든 역지사지든 해 볼 수 있는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현대 심리학 연구를 하면 할수록 도달하는 결론이 바로 이 점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사실. 이 사실 하나만 우리가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도 정신의 건강을 훨씬 더 잘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이것이 바로 인지 심리학으로 본 회복탄력성이다. 올해부턴 반드시 실천해 보자.
김경일 교수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며, 국내의 대표적인 인지심리학자이다. <어쩌다 어른>, <세바시>, <속보이는TV 人사이드> 등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지혜의 심리학』, 『마음의 지혜』 등의 저서를 펴냈다.